에고의 몰락.
마조히즘이라고 오인받을지 모르나, 나는 에고의 몰락을 꽤나 즐기는 편이다. 알을 깬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에고를 내 손으로 몰락시키고, 다음의 에고를 온몸으로 깨워낸다. 그 고통은 꽤나 즐거운 일이다. 산을 오르고, 산 정상에 있다 싶으면 과감하게 뛰어내린다.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이는 순간 정상에 머무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상에 올랐다는 안도, 그 달콤함에 취하는 순간 에고를 몰락시키기 어려워진다. 정점에서의 느낌은 정말 짜릿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엔 모른다.
우습게도, 남들 눈엔 고통스럽게, 내겐 그냥 하다보니 올라간 정상에서 나는 그저 공허함을 느낄 뿐이었다. 공허와 갈망. 끊임없는 고통. 질투 어린 말들에 귀가 얇아지는 것은 그래서다. 그저 해냈을 뿐인 것을, 주위에서 잘했다 하고 질투하면, 나는 그 에고를 몰락시켜 버린다. 귀찮고 지겹고, 게다가. 나는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 우스운 것은, 누구나 이렇게 다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은 본인들이 안 하고서 질투한다. 일중독자라거나 독하다거나. 나는 그렇게만 생각해왔다.
뭐든지 잘 버리는 나는, 이제야 온갖 구루들이 가득한 내가 원하던 산의 바닥에서 무지의 계곡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무척이나 고통스럽지만 그 희열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기뻐서 소리치고 싶기도 하고, 가슴 안에 기쁨이 치밀어 뜨거워지기도 한다. 어설픈 지식으로 선두를 차지하던 곳과 다른 곳이다. 그것이 몇 번의 과정 결과 명백해지자, 나는 마침내 새 꿈을 찾고 새롭게 살아갈 의지를 찾아내었다. 살아가고 싶다.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하리. 나는 늘 생에의 의지가 없었다. 늘 내년에 죽어야지. 그럴 거면 이거 다하고 죽자. 이런 식의 생각으로 과업들을 해내왔기에 역설적이게도 성적이 좋았고 승진도 빨랐다.
근데 이제 (한국인의 화법) 젊은 나이에 예쁘장한 여자가 그러면 욕을 많이 먹는다. 아, 이건 남자도 마찬가지겠다. 예쁘장한 남자. 오해 말길. 여기엔 어떤 편견도 없다. 그냥 못된 현실을 얘기하는 거다. 이제 와 고백하건대, 나는 속칭 말하는 예쁜 여자에서 탈피하려고 살도 찌우고 스타일도 바꿔본 적이 있다. 효과는 1도 없었다. 그래도 예뻤으니까.
난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그 일을 하기엔 눈에 띄는 외모였다는 걸 이제야 받아들인다. 이건 자랑도 아니고 푸념도 아니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기 때문에, 지금에야 덤덤하게 적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고통이기에 서술하는 것이다.
애니웨이, 이런 무지의 고통에 빠져 구루에게 혼나는 삶이라니, 눈물이 나와도 그 가치가 얼마나 큰가. 구루에겐 죄송하지만 나는 매일 너무 감사해서 뭐라 표현을 못하겠다.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기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혼신을 다해 매일 혼나도 괜찮다. 두려움은 크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까짓 두려움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기꺼이 나를 혹사한다. 혹사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정신이 취해 그냥 행복하다.
내 부족함을 단번에 알아주고, 부족하다 지적해주고, 부족함을 혼내주는 구루를 만나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다. 잘한다며 욕하던 이상한 세상에서 나와 내 생각처럼 내 부족함을 단번에 파악하고 이끌어 주는 세상을 만난 것은, 엄청난 행복이다. 이런 세상에서의 집착과 광기와 혹사는 그 어떤 세상에서의 그것보다도 가치가 있다. 무궁무진한 시너지를 낸다. 절망의 계곡에서 눈물에 첨벙이다가도 기뻐서 웃는 것은 그런 이유다. 웰컴, 무지! 계속해서 나를 굴리고 갈아서 기쁘게 해주길.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돌을 굴리고 있지만 나는 정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