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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an 30. 2024

이윽고 내가 너를 알아봤을 때

무엇을 그리워할까. 나는 요즘들어, 아니 꽤 자주, 너의 껍데기와 분투하고 있다. 너의 껍데기와 춤을 추고, 그리워한다. 처음의 너를 그리워하는 것이지, 끝의 너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서 위안이 된다. 네 껍데기는 내게 분명한 흔적을 남긴 것 같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나. 무엇을 꿈꿨나. 왜 그리 숨가쁘게 달리기만 했나. 알 수 없다. 멈춰서는 게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 순간만큼 나를 두렵게 하는 건 없다. 꿈꾸는 게 사치라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나 참 사치스럽게 꿈꾸며 살았구나. 언젠가 그걸 깨닫는 날이 올 거란 것도, 그럼 끝나게 될 거란 것도 알아서, 환경으로 나를 옭애마고자 했다. 안정되는 게 싫었다. 꿈을 포기하게 되는 게 싫었다.


정말 꿈이었을까? 내가 원하던 게 정말 내가 원하던 걸까? 나는 내가 아까웠다. 가진 것이 많은데도 환경에 눌려있는 게 보였고, 그렇게 지나간 세월들이 사무치게 한스러웠다. 그래서 달리기만 했다. 달리기만 한 덕분에 이런 일기도 쓰는 것이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달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견이 없을줄 알았는데, 최근의 나는 이상하다. 그저 모든 것에서 평평해지는 기분이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부당한 것들을 그저 참아내면서 (생각보다 나는 역치가 높은 편이라,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일 때가 많다.) 있다. 이전에도 여러가지 일을 겪었지만, 최근의 좌절도 깊다.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아질 것이 없다는 걸 아는 데서 오는 것이다. 물론 환경이 나아지고 여러 가지로 개선되고 있다는 걸 아는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시골동네같은 감성으로 기자 하나가 화장실을 가면 몇 장의 휴지를 쓰는지 확인하고, 득달같이 방송하는 B사감 같은 이들을 보아 넘겨야 한다는 데서 오는 허탈함이다.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기사의 요건을 내가 어떻게 상사에게 가르쳐야 할까. 몇 번째인가 대체 이게. 그냥 우스운 일이다. 아주 작고 작은 일만 써본다. 사무실에 갇혀있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는 것도, 속도가 빠르면 대충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게으른 자들 속에서 나는 숨을 못 쉬고 있다.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월급을 받고,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알잖나. 세상에는 거저 먹는 사람이 많다.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너무 치열하게 1등에 익숙했던 걸지도. 그렇게 하라고 했던 선배들과 데스크 덕에 일을 잘 배운덕일지도.


모든 게 달라지고 있다. 내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드립 한 스푼 추가)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나 소용돌이치고 있다. 많은 것이 조용히 묻히고, 그저 지나가는 일이 된다. 우습다. 무얼 위해 그리 치열하게 살았나. 아니 그 덕분일까. 모르겠다.


나아지고 있다. 그렇게나 몰두했던 사이드 프로젝트도 끝나고 전쟁같던 사기당한 일도 해결했고, 그 여파로 억울한 일들이 이어지지만, 그까짓 것은 내 살아온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웃어 넘긴다. 어른이 된 건지 포기한 건지 둔감해진 건지 알 길이 없다. 참 많은 것들이 부당한 게 분명한데, 그저 넘긴다. 나는 카르마를 믿는다. 늘 그랬듯, 카르마가 해결할 것이다.


다만 내가 그리운 건 10여년 전의 인연, 그 후의 인연, 수년 전의 인연, 그런 것들. 늘 주변에 있던 그것들. 지금도 내 곁에 가득한 그것들. 하지만 다른 걸 더 우선하는 탓에 버리고 버려진 것들. 뭐가 맞는 답이었을까.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다. 지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나이가 든 탓인지 세월이 약하게 만든 건지 (같은 말이네) 10여 년 전 그 때 그 손을 잡았더라면, 수년 전 그 손을 잡았더라면. 별의별 가정이 이어진다. 안다. 1%도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을. 지나고나니 생각할뿐 그렇게 할 생각도 없는 냉혈한이면서(오글) 별 생각을 다 한다. 


두 달 전 나는 자다가 마구 웃으며 깼다. 매우 오랜만의 일이었다. 간질거리고 그저 기분이 좋아서 아이유의 스트로베리 문을 틀고 흥얼거리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젠 자다가 소리를 치며 깼다. 그것 또한 몇 달 만의 일이었다. 오지 마라 과거의 기억들이여.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다고 또 생각한다. 그 기억들이 있으니 지금에 온 거야 라고 늘 굳게 믿어왔는데, 요즘은 그냥 무거운 기억은 다 정말 깨끗이 버리고 싶다. 돌덩이처럼 굳은 마음인데도 나도 모르는 구석탱이에 돌더미에 깔린 기억들이 있는 모양이다. 다 지워지길 바란다. 간절하게.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을 들으면 그 날의 기억, 반짝이던 바다, 모든 것이 기억난다. 그 때 손을 잡았다면 또 다른 인생이 펼쳐졌겠지. 모르겠다. 모든 기억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렇다. 너무 많은 인연은 버겁다. 무겁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며, 안아야겠지. 그냥 일기장에 도닥이며 정리한다. 아무 일도 없고, 아주 안전하고, 나아지고 있다. 늘 그렇듯 나아질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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