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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an 30. 2024

자기파괴

엄청난 자기파괴욕구가 들 때면 나는 맥주를 산다. 막걸리도 산다. 한 캔을 사서 일주일을 홀짝 홀짝 마신다. 그럼 뿌듯해진다. 허세 가득한 구매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먹을 것처럼 거뜬한 척 산다. 가게 점원은 오늘은 맥주 안 먹냐고 놀린다. 난 걸음도 빠르고 쌩쌩 다녀서 말 섞을 새도 없는데, 그걸 기억하고 몇 번을 아는 체를 한다. 그럼 괜히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할 것 같지만, 나는 다 먹지도 못할 맥주를 또 사진 않는다. 막걸리도. 근데 자기파괴 욕구가 심해지는 때가 오면, 기어코 사고야 만다.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도 아니다. 뭔가에 취해있고 싶을 때 구매하거나, 파괴욕구가 생길 때 사거나. 그런 것 같다. 술은 끊은지 오래인데, 그냥 요즘은 몇 번 구매하게 됐다. 그래봤자 서너 번이지만, 주의하고자 써둔다. 술은 건강에 안 좋으니까. 그냥 나는 한 모금씩 마실뿐. 먹지도 못할 걸 사면서 내게 화를 내는 방식이라고 이제야 느낀다. 그 어디에도 화를 내지 못하는 나는 늘 내게 화를 푼다. 나를 친절히 대해주자고 의식적으로 몇 번을 다짐해도, 그게 잘 안 된다. 화를 내는 이유도 없다. 내 가장 친한 친구는 나니까, 내 슬픔을 위로해달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좀 더 지내봐야 알 것 같다. 내 평생의 동반자는 나니까, 더 좀 잘 알아봐야지.


언젠가는 운동에 중독돼 살았다. 그러다 다쳐서 그런 생활을 관뒀다. 연기를 하거나 음악을 시작하거나 미술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지 꽤 되었다. 그러나 지출의 우선순위에서 늘 밀렸다. 그러다 생각했다. 그냥 해버리면 되잖아. 요샌 그런 생각을 한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시간이 빠른 건 알았는데, 좀 다른 느낌이다. 어쩐지 2019년에 멈춰 있는 것 같다. 그 전엔 2013년이었는데, 이젠 2019년이다. 그 후의 일은 기억이 잘 안 나는 것만 같다. 그 후의 일들은 어제 일 같기도 하다. 그 모든 게 과거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현재의 숙제 같다. 그렇지 않은데도,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건지 뭔지 모르겠다. 얼떨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리까리하다. 뭐야 이게. 이런 느낌이다.


경력직으로 이직을 자주 하다보면 텃세를 자주 겪는다. 일을 잘하면 텃세는 당연한 수순이다. 스스로 모든 것에 둔감해진 게 우습다. 사람들은 너무 감정적이다. 감정이 없었다면 세상이 더 잘 돌아갔을 텐데.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한다. 배려의 탈을 쓰고, 일을 하고, 예의를 지키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모르겠다. 새로운 환경에 와서 좋은 건 웬만한 이들이 다 친절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처럼, 나는 여기에서도 친절하고 스윗한 이들 덕분에 길만 걸어도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불만투성이인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래도 숨쉴 곳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과 비가 엄청 내리는 이번 계절에, 나는 그것들을 온 몸으로 맞으며 즐거워 했다. 


최근엔 어떤 인연을 정리하기로 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아주 오래 전부터 내 곁에서 그저 염탐꾼처럼 내 소식을 기다리고, 좋은 일엔 욕을 하는 요상한 선배가 있었다. 업계의 인연 때문에 이어가려 했지만, 그저 불만만 끄집어내려는 것이 느껴져 이제 정말 잘라내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토를 할 것만 같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 잘라낼 수 있을 만큼 내가 자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정리, 인간 정리는 늘상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신저도 가끔 탈퇴해줘야 한다. 단톡방 정리도 마찬가지다. 텃세 부리겠다고 작정한 이들 앞에서, 그런 소인배짓거리 먹히지 않는 담대한 내 T정신(드립을 조금 넣었다)에 내 스스로 감탄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 도시의 스윗한 낯선 이들과 늘 하던 일에 텃세부리느라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무감각한 희안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라라랜드를 보며 가슴뛰던 내가 사라지지 않기를. 사라지지 않았기에 일기장을 도닥이는 것일 테지만, 앞선 일기에도 썼듯 최근 들어서야 그러한 젊음, 열정, 도전이 사치라는 표현을 일견 이해하게 되어 (그렇게 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주장이었다는 것) 괜히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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