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괜찮아. 당황하지 말고.
"엄마, 오늘 치과 가는 거 알죠, 4시 15분까지 학교 앞에서 만나."
이젠 딸이 알아서 서두른다. 집에 와서 가방 놓고 옷 갈아입고 출발해도 된다. 길을 헤매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내비게이션 예상 시간도 약속 시간 전이고. 나로선 억울하지 않다. 몇 번을 오가도 길이 익숙하지 않은 것도, 번번이 길을 잃고 유턴에 유턴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멘털이 탈탈 털린다. "도대체 얼마나 일찍 출발해야 하는 거냐고!!!"
결혼하고 둘째 아이를 낳고서야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신체검사를 받고 갱신할 때 빼고는 무려 15년을 장롱에 있었다. 애들을 데리고 버스를 기다릴 수도 없고 버스를 탄다 해도 원하는 곳에 버스가 서지 않는다. 택시를 부르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더 이상 운전을 미룰 수 없었다. 동요를 크게 틀어놓고 아이들을 카시트에 앉히려는데 스스로 카시트에 오르는 애들에 웃음이 났다. 그랬다. 얼마나 눈치를 보며 택시를 탔던가. 이제 맘껏 노래를 부르면서 떠들면서 깔깔 웃을 수 있다. 미러로 보이는 저 신이 난 발. 음악에 따라 동동 구르는 발을 보면 운전하기 잘했다 싶다. "이젠 발로 빵빵 차도 뭐라는 사람 없다! 오예!!" 어린이집은 집에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렇게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길을 잃기 시작했다. "엄마, 다시 집이 나왔어."
물론 내비게이션을 이용한다. 그도 없으면 큰일이니까. 그럼에도 다시 제자리이다. "엄마, 아까 그 길인가 봐." 집 주변만 빙빙 도는 게 이상했던지 어린 딸이 뒤에서 알려준다. 신나게 출발한 것도 잠시 진땀이 흐르고 앞길이 막막해진다. '왜 이렇게 길이 다 똑같아 보이는 건지.' 그동안 들통나지 않았을 뿐 나는 길치, 방향치이다. 늘 가던 길로 익숙한 길로 다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느라 길 찾을 필요가 없었기에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운전을 하면서 길을 그렇게 잃었다. "아, 또 놓쳤다. 여기가 어디지? 내비야, 다시 길 찾아줘." 그렇게 별일 아닌 듯 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좌절했다.
그날도 어린이집을 가려고 아이들 카시트 벨트를 채워주는데 딸이 말했다. "엄마, 내가 어린이집 가는 길 잘 알려줄게. 걱정 마."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어떤 마음으로 딸은 그렇게 말했을까. 신나게 노래 부르느라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나를 보고 있던 것일까. 엄마는 도움이 필요해 보였을까. 이 길로 가면 어린이집을 가는데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떠하든 나는 진심으로 그 말을 믿어버렸다. 5살 딸의 말을 의지했다. 마치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사람처럼 단번에. 걱정이 사라지고 나를 구해줄 것이라 확신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딸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하면 아들이 "이쪽으로" 따라 했다. 딸이 "저쪽으로" 하면 아들이 "저쪽으로" 하며 반박자 늦게 가리켰다. 뒤에서 돌비 써라운드로 방향을 알려 주는 통에 엄마는 살아났다.
"여기서 내려줄 테니깐 얼른 가서 접수해. 주차하고 올라갈게." 이미 준비하고 있던 딸이 후다닥 내린다. '아, 고생했다. 목적지는 같은데 한 번도 같은 길로 온 적이 없네.' 주차하고 한숨 돌리는데 어이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어린이집을 헤맬 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이 없다. 헤매는 건 기본값이며, 로터리 돌다 엉뚱한 길로 나오고, 고속도로에서 잘못 빠져나온다. '어, 이 길이 아니네'는 비일비재하다. '제발 제발 너무 돌아가지만 말자'하며 "띵, 띵, 띵' 내비게이션이 새로운 길을 찾기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변한 게 있다. 카시트에서 이쪽, 저쪽 외치던 딸은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조수석에 앉아있다. 치과에서 집에 가려는데 딸이 말한다. "엄마, 제발 내비대로 가세요. 모험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 "..." 그래 나만 여전한 게 아니었다. 딸도 여전했다. 그때도 지금도 예쁜 말로 나를 응원하는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길을 잃어도 좌절할 틈을 잃도록 변함없는 그 마음에 지금도 나로 살아간다. 자신 있게 길을 잃고 포기하지 않는다.
<상단이미지의 차량은 제 소유가 아닙니다: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