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질문들'이란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김이나 작사가와 책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마음이 실린다. 영상의 시대인 작금에서 말과 글의 대명사인 두 사람의 대화를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 집중한다.
읽는 시대, 어린 시절 최고의 즐길 거리는 책이었다.
두 분은 어린 시절 책에 대해서 나누었다. 손석희 아나운서는 학교 가기 전에 동화책에서 읽었던 '전국 방방곡곡'이란 모르는 단어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김이나 작가 또한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인물, 공간 등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책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시각 매체들이 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 공간들을 제한해서 아쉬워했다. 김이나 작사가의 기억 속의 책 <요술 분필>은 주인공이 분필이 그리는 대로 사람과 사물이 나타나서 생기는 에피소드이다. 이야기 속 상황과 감정들을 글자로 이미지화시키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문자를 자기만의 상상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잠시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책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올려 본다. 학교 다녀와서 골목에서 놀다가 배고파서 집에 오면 <매칸더 브이>, <바람돌이> 같은 TV 만화 보고 뭐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 집에서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친구 집에는 위인, 명작전집이 있었는데 (그 책장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동색의 책장에 하얀 하드표지로 된 책이 꽂혀있고 유리 창문을 옆으로 밀어서 안에 있는 책을 꺼냈다.) 자주 가서 읽고 빌려서도 읽었다. 지금 돌아보면 갱지에 그림 없고 글자로 가득한 두꺼운 책이었는데 꽤 재미있게 읽었다. 돌아보면 인생 첫 몰입의 경험이었다. 한석봉, 신사임당, 세종대왕도 만났고 빨간 머리 앤, 키다리아저씨, 톰소여, 소공녀도 다 그때 만났다. 딱 그만큼이었다.
학교에서는 독후감, 글짓기, 그림 그리기 행사가 있었다. 정말이지 매월 있었다. 새마을의 달, 환경의 달, 호국보훈의 달, 불조심의 달, 달, 달... 그래도 원고지와 4절지 중에서 원고지가 편하긴 했다. 유난히 필독 도서를 싫어했는데 돌아보니 필독은 필독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 싶었을 때 여지없이 만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과 에피소드들은 초등학교 때 읽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아쉬움을 들게 했다. 필요에 의한 글이 아니라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장치를 스스로 만들었으면 책에 대한 내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지금의 즐거움은 영상이다. 빠른 화면 전환과 자극으로 붙들어두는 15초. 보상에 보상을 더하는 과흥분 상태로 짧은 화면을 끊임없이 클릭한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처럼 멈출 수 없다. 서사는 당연히 없다. 사건을 만들기 위한 도입, 전개에 시간을 들이지 않다. 강한 문구로 시선을 잡아서 빠르게 할 말을 던진다. 현기증이 날만큼 정신없지만 지금 세대는 그것도 답답한가 보다. 그것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이유로든 서사가 없다는 것은 뭐랄까. 낭만이 없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은가. 서사를 궁금해하고 듣고 싶어 하는 근본이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소설, 영화, 드라마, 웹툰과 같은 장르뿐만 아니라 맘카페에 올라온 사건, 사용 후기, 방문 리뷰, 뒷담까지도 넘치는 이야기 소재는 주변에 즐비하다. 사람 사는 건 곧 이야기인데 이야기 없는 즐거움이 낯설고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 그럴까. 중고등학생 시절 학교에 가면 전날 본 드라마를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맛깔나게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닥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을 어느새 나도 들으면서 깔깔거렸다. "야, 너 어쩜 그렇게 대사를 다 기억하니?", "어, 난 이런 건 다 생각나." 이렇게 친절한 리뷰가 다 있을까. 구체적이고 정밀한 이 친절함에 그저 즐거웠다.
쓰는 시대, 나를 발견하다
김이나 작가는 책을 한 권을 읽고 가사를 쓸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그 퀄리티가 다르다고 한다. 500여 곡이 넘는 창작의 곡들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직장인같이 마인드로 임했다고 한다. 예술이라고 생각하면 못했을 거라고... 좋아하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토라져서 놓게 돼버리고 감정 소비도 심해진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이 한 작품을 만드는데 자신의 그 일부로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묵직한 단단함이 보였다. 글을 쓰는 것은 다름 아닌 나에 대한 메타인지임을 언급한다.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나를 자각하는 스스로를 제3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이 글쓰기라고 한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다양한 관점으로 자기만의 이미지가 표현되는 것이 흥미롭고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소설가 양귀자의 <모순>이라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를 영화, 드라마로 만든다면 실망할 것 같다. 나만의 안진진, 엄마, 이모, 김장우, 나영규의 이미지가 있고 그 시대의 안진진의 집, 골목 등의 배경이 있다. 그것이 너무 고유하고 애틋해서 영상으로 일반화해 버리면 억울할 것만 같은 기분 말이다.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을 책을 통해서 나만의 이미지가 되는 과정이 읽기이다. 그리고 쓰는 것은 나를 인지하는 통로라는 것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쓰면서 날것의 나와 만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너무도 다른 내 모습과 만나서 당황스러웠다. 글 쓰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것을 통해 나를 인지하게 되니 쓰는 자체가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것을 통해서 내 진심을 만나고 나라고 착각한 나와 직면한다. 내가 내 글의 독자가 되면서 나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당혹스러운 판단과 평가만 있지는 않다. 글을 통해 사람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고유하고 특별한 한 존재이지만 나처럼 생각과 사유를 하는 다른 존재가 있다. 나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다른 나'가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하고 위로받고 도전하며 응원할 수 있다는 것을 희한하게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느낌이 설레고 또 한편으로 편안해서 글을 쓰려고 하는 것 같다.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좋아서 글 쓰는 사람은 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말이다. 오랜만에 손석희 아나운서와 김이나 작사가의 대화를 듣고 행복한 몰입에 빠진다. 읽고 싶은 책이 있고 한 문단이라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오늘 충분히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