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학교 안 가면 안 돼?" 아침부터 시작이다. 이 말은 어린이집 보낼 때부터 익숙하게 들었던 역사 깊은 말이지. "엄마, 학교 가기 싫어." 하도 들어서 저 말이 진심인지, 그냥 해 본 말인지 이젠 판단이 선다. 나도 니 어릴 때나 진지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친구랑 싸웠는지, 선생님께 혼났는지... "엄마는 부르지 말고, 학교는 가고." 단순하게 대답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또 부대낀다. 학교가 힘들긴 힘들지. 어쩌냐. 이것도 과정인데. 약해지지 말고 강단 있게 말하고 보내지만 이미 내 얼굴에는 다 드러났을 것이다. '그냥 잘 다닐 수 없느냐.'
둘째는 워낙 학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규칙도 공부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친구를 좋아하나. 친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향성을 가진 아이도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을 싫어할 이가 없다. 다만 다소 예민해서 너무 과격한 친구, 욕하는 친구, 선생님 말 안 듣고 수업을 방해하는 친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공부는 싫어하는데 공부 방해하는 아이를 싫어하는 이 아이러니) 어쨌든 이렇게 친구도 가리니 남자아이들 특유의 서글서글한 것과 몰려다니면서 운동하는 그런 맛이 없는 이 아이는 친구 사귀는 것도 여간 어렵지 않다. 고르고 골라 겨우 사귄다고나 할까. 마음이 겨우 맞아서 친구를 사귀면 전학을 가야 한다.
최근에 많이 듣는 말, 혹은 내게 건네는 안부 인사는 적응 잘하고 있느냐이다.
적응 (適應) 1.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 따위에 맞추어 응하거나 알맞게 됨. 시차적응 2. 생물이 주위 환경에 적합하도록 형태적, 생리학적으로 변화함. 또는 그런 과정 3. 주위 환경과 생활이 조화를 이룸. 또는 그런 상태. 환경을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와 스스로를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가 있다.
8월 초에 이사를 했으니 환경이 바뀐 지 두 달 정도 보내고 있다. 집을 옮긴다는 것이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나에게는 남편 발령에 따른 생활공간의 이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엔 한 지역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다. 이런 나에게 이사를 자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고 삶을 뒤엎는 신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신나게 살았다.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과 기대가 그저 즐거웠다. 스스로를 변화시켜 적응하는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젊음은 생각보다 유연하고 공처럼 말랑거려서 반발력조차도 통통 튀기는 즐거운 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즐거움이 두려움으로 바뀐 것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부터이다. 결국 아이들의 상황이 부모의 상황이 되지 않는가. 아이들이 적응 못하고 지내는 시간 동안 나도 같이 적응을 못하고 둥둥 떠다니면서 표리 한다.
환경을 어떻게 나의 구미에 맞아떨어지는 조건으로 세팅한다는 말인가. 거대하고 어려우며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를 변화시켜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호 간의 적절한 균형(balance)을 찾아 편안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너무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으면서 균형점에 이르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언제쯤 아들이 즐겁게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제발 성격이 저렇다고, 타고난 기질이 저러니 어쩔 수 없다는 결론만은 피하고 싶다. 나는 아들이 즐겁게 학교 가는 것을 보고 싶고 그것이 적응, 균형에 이르는 길이다.
"엄마, 나 학교 안 가면 안 돼." 또 시작이다. "자기야, 나도 일하러 안 가면 안 돼." 남편도 라임을 맞춘다. "나는 원래 학교 가기 싫어." 딸도 거든다.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학교도 안 가고 직장도 없는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다 나가! 빨리 나가!" 툴툴거리는 3인을 등 떠밀어 보내며 생각한다. '운동을 등록해야겠어. 나도 살아야지.' 사람은 극한으로 치달으면 자기만 보인다더라. 내가 건강해야 주변을 돌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아프면 내가 낫는 것이 제일 먼저이듯 결국 적응, 균형 앞에 개인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 나를 위해 네가 적응해야 겠다.
'아들, 내가 도와줄 수 없어. 네가 해결해 나가야 해. 조금 더 주변을 보고 친구들에게 다가가 보고. 캐치볼 하면서 친해지고. 코난 이야기하면서 친해져. 시험 못 보면 오답노트 3번씩 쓰면 돼. 오답 쓰기 싫으면 공부해서 시험을 잘 보면 되고.' 이런 말 엄마가 하면 다 잔소리니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면서 기도로 털어낸다.
아들, 너는 멋지게 적응하고 있다. 스스로를 바꾸고 있다. 걱정마, 환경도 바뀌고 있거든. 그래서 너의 균형점에 이를 거야. 지금은 과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