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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씨 Sep 11. 2020

운동화와 오천 원

운동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옛 기억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운동화 한 켤레를 매일 신었다. 운동화는 걷고, 뛰는 고단한 인생으로 노쇠하였고, 할머니의 쪼그라진 피부처럼 여기저기 잔 주름이 많았다. 본디 흰색이었을 것인데, 신 바닥은 흙먼지를 뒤집어써 누우런 황토색으로 덮였고, 몸통 부분은 검은색인지 회색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색으로 바래버렸다.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라도 되면 토요일까지 일을 나가는 엄마는 퇴근하고서 꾀질 꾀질한 운동화를 화장실로 가지고 가 세숫대야에 넣고 물에 푹 담가 뒀다. 세숫대야 물은 금세 구정물로 변했고, 운동화도 꾸정꾸정하게 변했다. 엄마는 푹 익어버린 운동화를 꺼내 바닥에다 처억- 처억- 몇 번을 패대기치고선 솔로 팍-팍- 운동화의 쉬어빠진 껍질을 긁어냈다. 그럼에도 운동화는 제 모습을 점점 잃어버리기만 했다.


 장마라도 시작될라치면, 아이고, 마를 틈이 없는 운동화에서 꼬락내가-, 거기서 발을 빼보면 발꼬락에서 꼬릉내가- 심하게 났다. 엄마는 하이고- 냄새- 하고 혼을 내셨다. 화장실에서 발을 씻는 것 말고 내가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사달이 났다. 걷다가 발바닥이 가벼운 느낌이 들어 한쪽 발을 뒤집어 보니 신 밑 창이 심하게 닳아빠져 있었다. 특히 엄지발가락에 힘이 많이 들어갔는가, 엄지 쪽은 구멍이 난 것 같았다. 밤이 되어 회사에서 퇴근한 엄마를 보자마자 신발을 사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운동화를 한 번 들어보시더니 시장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새 운동화를 살 생각에 신이나 엄마 뒤를 쪼르륵 따라나섰다.


 시장에 신발들을 우르르 모아 두고 팔고 있는 인적 드문 가게가 있었다. 가게 주인은 피부도 감았고, 주름도 많은 아저씨였다. 노란 백열구 빛이 아저씨 피부를 밝히기는커녕 더 어둡게 강조하고 있었다. 엄마는 신발들을 주욱- 보더니 디자인만 조금 다른 하얀색 운동화를 집어 들으셨다.


“마음에 들어?”


개성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어, 좋아 이렇게 대답해버렸다.


“아저씨, 이 운동화 얼마예요?”


 “이만 오천 원만 주쇼~”


 엄마는 검은색 장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려다가 말했다.


“아, 아저씨 어쩌죠. 제가 지금 이만 원만 가지고 있는데…이만 원만 드리면 안 될까요?”


“아이고~ 시간도 늦었는데, 뭐 그러시든가요~”


그러나 나는 보고 있었다. 엄마의 검은색 장지갑에서, 노란색 백열구 빛에 비치고 있던 황색 지폐 종이를. 나는 엄마가 착각한다고 생각했다.


“엄마, 여기 오천 원 있잖아.”


 순간 엄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니, 얘가 왜 이래~ 돈이 어디 있다고 라며 반응했고, 앞에서 내 이야기를 다 들었을 아저씨도 표정이 굳어갔다.


“아니, 있는데 왜 안 줘!”


“아~! 그냥 저리 가 있어!”


 나는 급속도로 기분이 상해갔다. 엄마는 돈을 덜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저 돈을 더 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배우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가르쳤고, 나는 엄마가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집에 오면서도 계속 뾰루퉁한 표정으로 엄마를 봤고, 엄마한테 신발 사주셔서 감사하다고, 잘 신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엄마가 정말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었다. 엄마에게 화를 내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른이 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때가 와서 그럴까, 그때의 엄마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돼서 그럴까.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빚과 폭언과 폭력을 한껏 던져버리곤 했다. 엄마는 혼자서 일을 하며 나와 동생을, 우리 집을 책임져왔다. 그 검은색 장지갑에 들어 있던 오천 원 한장은 어쩌면 그날 저녁 나와 동생이 먹을 반찬을 살 돈이었을지, 다음날 학교에 들고 갈 준비물을 사야 했을 돈이었을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엄마에게 그 오천 원은 너무나 무거운 돈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발 장을 열어보면, 이제는 신발이 몇 켤레나 있다. 그때, 신었던 쭈그렁 텅텅, 흙먼지 뒤집어쓴 운동화 같은 것은 집에 없다. 그러나 왠지 그 신발이 잘 안 잊어질 것 같다. 엄마가 그 운동화에 대한 기억을 이미 다 잊어버렸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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