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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씨 Mar 18. 2022

철학과에 가고 싶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응원할게



고3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외삼촌 집에 갔었는데, 엄마는 당시 대학생이던 사촌 형에게 나의 진로 상담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촌 형은 고모의 말에 불평 없이, 수험생이란 무게에 눌려 침울한 표정으로 조용히 서있는 사촌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가게에서 음료수와 과자 같은 잡다한 간식거리를 사 와서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형은 내게 어떤 대학, 어떤 과를 가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대학은 모르겠고 철학과에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종교도, 삶의 목적도,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겠던 나는 철학과에 가면 뭔가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의 부재로 인해 텅 비어버린 내게 필요한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너 철학과 나와서 뭐 먹고살래? 철학과를 왜 가. 왜."


무슨 전공을 하고 싶냐고 물어서 철학과 가고 싶다고 말한 건데, 듣자마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철학에 관심이 많다고 항변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렇구나라고 해줬어야 하지 않을까.


"개똥철학이야. 네게도 뭔가 고민과 해답이 있겠지. 그런 걸 개똥철학이라고 한다고. 나와서 굶어 죽기 딱 좋다 야."


그 대화의 끝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이후로 내 입에서 철학과라는 말이 나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먹고살기 위해 어디를 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형이 간과한 부분이 있다. 이미 난 문과생이었는데, 이 시대에 문과 출신이 뭘 하든 먹고살기가 어디 쉽던가. 아무튼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찾다가 사회복지학과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고령화 사회가 이슈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딘가 취업은 되겠지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지금 나는 사회복지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글을 쓴다.  인생에서 사회복지는 대학교 전공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오히려 글이 내게 더 큰 의미를 차지하는데, 아무래도 철학과를 졸업했으면 글 쓰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도 싶다. 사촌 형은 그때의 대화는 이미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은 내 인생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누군가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마음껏 해보라고 얘기할 테다. 적어도 내가 그 인생을 책임지고 업어갈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내 인생도 어디로 갈지 모르겠거늘 그의 인생이야 어쩌랴. 그저 응원 한 마디 건네는 것 말고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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