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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씨 Feb 19. 2021

감당할 수 없는 슬픔들

그들의 행복을 빌며

 과거 일했던 직장에서의 이야기다. 사회에서 주 52시간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전이었다. 직장마다 노동 환경에 관한 분위기도 방식도 달랐을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던 곳은 6시에 퇴근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저녁 6시가 되면 막내뻘 되는 사람이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직원들에게 저녁 식사 여부와 메뉴를 묻고 다녔다. 직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저녁을 먹는 사람과 안 먹는 사람으로. 보통 직원들 식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에(다행히 직원들에게 돈을 내라고는 안 했다.) 당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웬만하면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사람들은 당연히 저녁 9시~10시까지 일을 하다가 퇴근을 하는 것이 사무실에서 통용되는 암묵적 룰이었다. 저녁을 먹고 감히 바로 퇴근을 하는 용감한 자는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저녁을 안 먹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그럼 바로 퇴근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8시가 될 즈음까지 일을 하다가 사무실을 나갔다. 늦게까지 저녁도 안 먹고 왜 그랬을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저녁을 먹지 않는 게 또한 암묵적 룰이었다.


 우리 부서의 부장님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골드미스를 선택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사무실에서 가장 늦은 시간까지 일하다 집에 가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내가 일이 남아서 휴일에 출근을 했을 때도 제일 자주 마주친 사람이었다. 매일 아프다는 소리와 한숨소리를 내쉬었던 것이 기억난다. 사십 대 중반이었던 그분은 열정적으로 일했고, 직원들이 만드는 서류의 글자 하나까지, 운영하는 사업의 사소한 진행사항까지 온 신경을 다 쏟아내는 분이었다. 가끔 생각했다. 그분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



 직속상관인 과장님도 여자분이셨다. 과장님은 몇 년 전에 결혼을 했고 당시에 아이는 없다고 했다. 과장님이 결재해준 내 서류들이 자주 부장님으로부터 반려가 되어 같은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분이다. 신입인 나를 잘 챙겨주려고 노력했고,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노력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과장님이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관리자들은 이유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결근 사유에 대해 듣지 못했다. 무거운 표정을 한 채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왠지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게 쉽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과장님은 자리로 돌아왔다. 약간 편해 보이면서도 기쁘지는 않은, 오히려 흐릿한 허전함이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팀원들에게 웃어 보였다. 나는 곧 결근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과장님이 복귀하고 며칠이 지나 과장님과 팀원들과 함께 외근을 나온 날이었다. 일정이 마무리되고 과장님은 팀원들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쌀국수집으로 기억한다. 맑고 뜨거운 국물 위에 고기 몇 점과 숙주나물이 올려져 있던 쌀국수를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을 때였다. 유산을 했어. 과장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결혼을 하고 몇 번인가 유산이 반복되었다고 덧붙였다. 아이를 갖기 위해 잠시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는 설명을 했다.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살짝 웃음기를 담아 자신의 결정을 부하들에게 설명하는 분 앞에서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국수가락을 입에 넣었다.



 왜인지 모르게 새로 온 과장님도 여성이었다. 이번에는 결혼을 했고, 다섯 살 정도의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일처리를 확실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그분은 인간적인 부분까지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과장님은 야근을 하던 어느 날 핸드폰으로 딸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쁘고 귀여운 아이였다. 내가 물었다. 이렇게 늦게 퇴근하시면 딸은 어떻게 보세요. 과장님은 출근하는 날에는 잠들어 있는 딸의 모습만 본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울었다. 내 가족 이야기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일주일에 엄마를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아이 생각이 났던 것 같다. 그리고 마찬가지인 어른들도. 사실 힘듦과 괴로움으로 가득 찼던 내가 그들의 이미지를 빌려 슬픔을 터뜨린 것일 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과장님에게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열거했다. 그중 한 가지는 과장님과 과장님의 딸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실이 너무 슬펐다고 전했다. 과장님은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맞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 내가 주제넘었다. 다만 나는 그들처럼 담담하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정규직으로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오래오래 다니고 싶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라도 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그리고 1년을 채우기도 전에 그만둔 나는 실패한 사람이었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만 같았다. 두려웠다. 사람들의 시선도, 내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시선도. 하지만 나는 그 당시의 슬픔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감당하며 사는 인생 역시 실패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에 당시 직장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사진 게시판에는 직원들의 단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예전 동료 몇몇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단하다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견딘 시간만큼 성장하고 무언가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얻지 못한 것이리라.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그 부장님도, 과장님들도 사진에 없었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잠시 그들의 행복을 마음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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