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이 재개봉되면서 그 시절의 감성을 다시금 반추해 보는 것은 지금 같은 늦가을의 정취와도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유행했던 편집 방법(인과의 순서를 바꿔서 편집한 후 영화의 끝에서 사건을 정리하듯 다시 인과관계를 맞춰서 보여준다)을 다시 보니 10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변화를 거친 시간이구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우연히 만났고, 뜨겁게 사랑했고, 서서히 지루해지다가, 서로에게 지쳐가고, 결국에는 하루하루가 괴로운 시간을 말끔히 정리해 버리기. 과거를 깨끗하게 소각해내면 새로운 내일을 시작으로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부터 영화는 시작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거의 사진이나 과거의 일기장. 그리고 평소에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간밤의 꿈속에 불현듯 재현되면서 느끼게 되는 지난 어떤 사건에 대한 부끄러움과 공포스러웠고,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마주치게 되면 억지로라도 잊고 싶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거 사랑했던 사람과의 흔적은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면 이 잡듯이 찾아내서 없애는 것이 새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도 어쩌면 서툴었던 과거의 나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서툰 과거도 나이고, 지금을 사는 것보다 과거의 순간으로 혼자 숨어버리려고 하지 않는 이상 과거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 매우 중요한 소재인 것이 틀림없다.
결국에는 깡그리 소각되어 버린 과거. 그러나 그의 무의식은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한 일에 대해 후회를 하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그녀와는 상관없는 더 깊은 과거 속에 숨겨두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진공 청소기 같은 기억 소각사들은 그가 숨겨 놓은 그녀의 기억을 일일이 찾아내 파괴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어떤 한 순간에 단박에 생겨날 수는 없다. 태초의 인간이라고 하는 아담도 조물주의 형상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고 하고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가 재료가 되어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미 존재하는 것 없이 만들어지는 존재는 어느 것도 없다. 지금의 나 역시 수많은 시간과 경험, 소소하게 일궈 온 일상이 만들어 낸 역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클레멘타인이 과거를 지우기로 결심한 순간을 전하는 박사는 맨 처음 이렇게 이야기한다. "클레멘타인은 매우 괴로워하며......" 그리고 클레멘타인에게 전달되어 온 녹음 테이프에서 그녀 스스로 고백하는 그에 대한 이미지는 '그는 지루한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그녀의 성정으로 보건대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그녀는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랑을 견뎌내지 못한 듯도 싶다. 사랑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고, 일상이 되기 전 항상 반짝거리던 사랑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녀는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는 현재 느끼는 지루함의 시작이라고 판단한 그와의 기억을 소각시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와의 기억을 소각해버림으로써 그녀는 그녀 자신도 일부 소각시켜버렸다.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 낸 그녀의 일부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와 기억을 나누어 가진 조엘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라지지 않은 특별한 감정으로 그녀를 다시 찾아 냈다. 이것은 그녀와의 사랑했던 날의 기억을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조엘에게 그녀는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게 하는 즐거운 자극으로 기억되었고, 그녀가 주었던 행복했던 기억을 버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차이가 있다면 클레멘타인은 지루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반짝거렸던 과거의 한 시점으로 숨어들기를 했다면 조엘은 지루한 일상을 깨기 위해 과거의 즐거운 기억들을 현실로 소환시키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클레멘타인이 노력은 어느 누구도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고, 과거의 한 조각 기억에 연연하는 것은 현재의 일상을 절대 바꿔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없이는 현실의 내가 있을 수 없다. 과거는 현실을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하며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발전하게 하는 순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툰 과거의 반추와 반성은 지난 시절보다 세련된 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어제와 다른 오늘은 새로운 시련은 나를 다시 서툴게 할 테지만 과거를 지내 온 나는 그만큼 단단해지고 융통성도 생겼을 것이기에 과거의 나를 부정하기 보다는 시련을 이겨낸 과정을 겪은 나를 응원할 여유도 갖게 될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지난날 즐거웠던 기억의 한 부분으로 숨어드는 대신에 그때의 기쁨을 현실로 되살릴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지혜도 생길 것이라고 본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조엘의 사랑은 용감하다. 그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기억 파괴자들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부끄러웠던 어릴 적 기억들을 반추했다. 그리고 조엘의 노력은 파괴자들로 인해 그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잊혔을지언정 그의 무의식 속에 클레멘타인의 기억들을 향기처럼 묻혀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모두 소각되어버리고 난 후의 아침.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의식적인 이끌림은 자연스럽게 그를 그녀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녀는 그를 잊어버렸을지언정 그의 기억 속에 묻은 그녀에 대한 아련함은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가치를 존중해야지. 비록 어리고, 서툴고, 촌스럽고, 실수투성이일지라도 그런 것들을 이겨낸 용감한 오늘도 사랑해야지. 내가 살아낸 나의 역사를 부정하는것만큼 최악의 선택을 없을 것이고, 과거의 일부를 지워낸다고 더 나은 내가 될 것이라는 믿음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테니까 말이다. 결국 클레멘타인도 같은 기억을 공유했던 조엘로 인해 되살아났음은 기억이라는 것이 비단 내 개인의 소유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도 한다. 공유된 기억 중 단지 내 몫이 일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