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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화 Nov 27. 2015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One day

 단순히 내용만 보자면 새드 엔딩의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보고 난 이후 영화의 잔상이 남아 있다가 날씨라도 구물 구물 할 때면 다시 한 번 꺼내 보고 싶은 영화다. 중간톤을 유지하는 영상의 컬러감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충분히 자극시키고, 첫 만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연애의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으며, 비극을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채 20년 간의 시간 중 오직 단 하루의 일상만 조명해 준다. 이는 마치  일상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연인의 모습이 자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기억에 남아 불쑥불쑥 생각이 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러브 스토리지만 불친절한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단 한 가지의 친절한 서비스는  빛바랜 듯한 사진 같은 영상이다. 묵은 기억은 논리적인 서사로 오지 않는다. 마치 스틸 사진처럼 어느 날의 한 순간이 불현듯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어떤 이유도 없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버린 기억은 기억의 주인의 의지대로 연장되기도 사고 그대로 다시 묻히기도 한다. 영화의 진행은 불현듯  찾아온 해묵은 기억처럼  어느 한 날의 스틸 사진 같은 장면처럼 시작되고 그것을 기점으로 서사가 이어가며  이야기된다. 아슬아슬하게, 애틋하게, 아닌 듯 하지만 뭔가의 여지를 남겨 둔 그들은 그렇게 관객의 애를 태운다. 


 엠마의 여린 소녀 같은 감성은 몰래 좋아했던 덱스터와의 '섬싱'으로 이미 사랑이 시작되어 버렸지만 엠마와는 다르게 덱스터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라고 본다. 덱스터에게 엠마는 그저 졸업식 날 있었던 에피소드 중에 하나로 묻혀버렸을 '별 일 아닌 일'이었을 거다. 그러나 '별 일 아닌 일'의 엠마는 이미 덱스터를 사랑해버렸고, 즉흥적이긴 하지만 모질지 못한 덱스터는 엠마의 마음에 슬쩍 걸쳐진 채 오랫동안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친이라는 관계를 인정하긴 했지만 보기에도 너무한 덱스터의 매너 없는 행동과 이를 계속 포용하는 엠마와의 관계에서 그들의 기울기는 언제나 엠마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사랑이 식지는 않은 채 덱스터의 행동에 실망을 거듭하는 엠마는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다.  아니, 딱 한 번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덱스터에게 크게 실망한 엠마는 덱스터에게 절교를 선언하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도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그리고 그들은 확인한다. '우리는 헤어질 수 없어, 우리는 절친이니까.'


 섣불리 이들의 관계를 '사랑과 우정 사이'라고 하면 안 된다. 이들은 그 사이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의 관계를 이처럼 꼬아 놓았나 싶을 때쯤 드는 생각은 매우 미안하게도 그들의 묘한 관계는 그들 나름의 이기심이 아닌가 하는 딴지를 걸어본다.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고, 잃고 싶지 않은 자기애가 가득한 이기심. 엠마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고, 꿈을 이루지 못한 미완성인 자신을 놔두고 덱스터에게 마음을 다하긴 싫었을 테다. 덱스터 역시 불안하지만 무엇인가가 더 있을 것 같은 미래와 즉흥적인 삶의 자극을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덱스터에게 엠마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라는 근사한 방패막을 둔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의 자리를 오롯이 내주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맴을 도는 듯 하지만 언제는 굳이 만들어 붙일 필요가 없는 이유를 만들고서는 선을 넘기도 한다. 그리고는 쿨한 척 "우리가 그랬었지." 하며 '별 일 아닌' 에피소드로 묻어버린다. 엠마는 한 번도 솔직하게 자기의 본심을 덱스터에게 얘기하지 않는다. 덱스터는 한 번도 엠마를 위해 자기를 투자하지 않는다. 덱스터는 오직 자기가 필요한 순간에만 엠마를 찾고, 엠마는 자기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채 덱스터가 필요한 순간에 언제든지 자기를 할애한다. 이들의 관계는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왜 엠마는 항상 덱스터를 이해하고 위로해야 하며 덱스터는 왜 이렇게 엠마를 함부로 대하는가?


 우리가 관계를 맺는 그 어떤 사이에서라도 공평한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더더욱 그 관계는 불공평하다. 항상 더 사랑하는 쪽이 손해를 본다.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는 일방적인 희생처럼 보이는 그런 불공평한 관계. 공평한 에로스는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답은 슬프게도 언제나 같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공평함이 어쩌면 관계를 끈적거리게 유지시켜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이유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친구니까.', '그녀는 서투니까.', '그것은 실수였으니까.', '그는 지금 너무 힘드니까.' 등등...... 조금 덜 사랑하고, 조금 더 교활한 사람이라면 불공평한 관계를 조마조마하게 이용할 수도 있겠다. 엠마를 대하는 덱스터처럼. 그러면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자기애가 강한 상대는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갖가지의 이유를 만들어가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또 끈적끈적한 관계를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똑똑하지 못한 관계의 과정들을 우리는 연애라 하고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연애의 모습은 선택적으로 기억된다. 상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에 따라 아름답게 혹은 참혹하게 편집된 상태로 말이다. 


 일과 결혼 생활 모두를 실패한 모습으로 덱스터가 엠마를 찾아갔을 때 엠마는 일과 사랑을 모두 가진 듯 싶었지만 덱스터의 등장으로 엠마는 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덱스터의 세계로 옮겨간다. 마치 덱스터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 것 같은 엠마는 덱스터와의 관계가 명쾌해진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죽어버리고 만다. 그들의 관계는 결국에는 새드 엔딩이다. 20년 동안 엠마를 기다리게 하고 애태웠던 덱스터는 엠마의 죽음으로  그동안 엠마가 받았던 애달픔을 한꺼번에 받은 것 같으니 이 정도면 공평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평등한 관계로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나 고민은 모두 쓸데없는 일일 테다. 눈금 하나 틀리지 않는 정확한 저울로 잴 수도 없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두고 옳다, 그르다를 평가할 수도 없다. 내 가족이나 친구가 엠마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면 평생을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하겠지만 막상 그 사랑의 주인공은 모든 이유를 '사랑하니까'로 돌리며 이해할 수 없는 애타는 시간을 계속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잔소리를 해댔던 사람도 본인이 사랑의 주인공이 되면 불공평하고 바보 같은 일을 자처할 것도 역시 분명하다. 과거 제니퍼와 올리버가 만들었던 러브 스토리는 누구 하나 손해보지 않는 사랑을 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랑의 판타지를 갖게 하고 결국 죽음으로 끝난 비극에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러나 엠마와 덱스터의 사랑은 결이 다르다. 사랑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 마음을 교묘히 이용하는 것 같은 남자와 자신의 감정 때문에 모질지 못한 우유부단한 여자의 20년 간의 시간. 그 사랑은 결코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그들의 첫 만남과 그 이튿날의 모습도 감정의 흐름은 자꾸 끊기면서 핑크빛 기류가 지속되지 않는다. 사랑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고, 우유부단하고, 지지부진하며, 누군가는 자꾸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누군가는 교묘하게 상대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 같지만 그런 명료하지 않은 감정들이  얽히고설키듯 이어지다가 서로가 만족할 만한 선에서 나름의 정의를 내리게 되는 것. 구름이 잔뜩 껴 한껏 낮아진 하늘에 눈까지 펑펑 내리는  겨울날 문득 이 영화가 생각이 난 이유는 실제로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함박눈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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