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재스민
빈털터리가 되어도 샤넬 재킷은 지켜야 하고, 뉴욕 햄튼이 아니라도 버킨은 든다. 루이뷔통 캐리어에 미쏘니 카디건에 펜디 블라우스, 로저 비비에 플랫은 챙겨 나왔다. 비행기 좌석도 비즈니스를 탔고, 택시 기사에게 팁을 주지 못할지언정 버스는 타지 않는다. 일행이 맥주나 소다수를 벌컥 거릴 때에도 올리브 알이 한 알 담겨 나오는 마티니를 마신다. 언뜻 보면 허세를 부리는 한심한 여자 같을지도 모르겠다. 이 여자의 현재의 모습은 환경에 한 번도 동화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자의 모습을 어떤 연민도 없이 본다면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겉모습부터 우습게 보려고 한다면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미 없이 몸에 걸치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명품들을 팔아 쓴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덜 초라해 보일 거라는 생각도 들 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지속되어 온 시련 속에서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현실은 내가 생각해 온 이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고 이로 인해 자존감이 바닥을 쳐 버렸을 때 이를 어떻게 이겨내는지 질문을 하고 싶다. 완벽하게 차가운 이성으로 현실에 오롯이 적응하며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바로 앞도 생각하지 힘든 혼란 속에서 연속적인 악수를 둘 것인지 아니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현실을 잠시 외면하며 과거에 숨어있을 것인지.
인생의 위기를 극복했다고 하는 혹은 타고나기를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왔던 사람이 인생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자찬하는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이 썼다고 하는 자기관리서나 자서전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들 강한 정신력과 상황 분석력을 가지고 있는지. 심지어 그들은 운도 좋아서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의 여신은 그들의 편에 서 있기도 한다. 물론 그들 역시도 이미 지난 일을 성공했다고 하는 시점에서 기술하기는 했다지만 그들의 성공담들이 그리 감동적이게 들리거나 앞으로 내게 올 시련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들지 않는 게 사실이다. 야멸차게 들리겠지만 개인의 시련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절절하게 동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단지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그들의 상황을 연민을 가지고 봐 주는 것 외에는 타인이 줄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부탁하듯이 하는 말이 한 가지는 있다.
부디 네 존재의 가치를 하찮게 보지 말아.
재스민을 볼수록 그녀에 대한 연민이 커지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이유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그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그녀를 그녀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겉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는 몇 가지의 상징물들이다. 그것이 단순한 물질로만 보인다면 당신은 재스민에 대한 연민의 싹이 아직 트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단지 어렸을 때 부자 남편과 결혼해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만 자라 온 허세 가득한 무능한 중년 여자라고만 본다면 재스민을 이해하고자 하는 약간의 애정을 주길 바란다. 그것이 어렵다면 당신 스스로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당신은 어떻게 그 시간을 이겨냈는가? 당신이 그 상황에서도 놓을 수 없었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나?
긴 시간 동안 부러울 것이 없었던 상류층으로 살아온 그녀에게는 그 삶의 기억은 그녀의 삶의 대부분이며 그녀를 만들어낸 전부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잘못으로 무너져 버렸을 때 그녀가 느끼는 상실감은 그녀를 혼잣말하는 정신이 멍한 여자로 만들었고, 약과 술이 없이는 버티기 힘든 신경 쇠약한 까칠쟁이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버틸 수 있는 힘든 그녀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본인이 살아온 세상에서 자기도 모르게 키워 온 안목과 에티튜드는 열악한 현실의 상황에서도 그녀를 우아하게 보이게 해 주었고, 이런 아우라는 어떤 이들에게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부르게도 했지만 이는 그녀가 살아온 세계로 다시 편입되게 만들어 주는 열쇠의 역할도 했다. 만일 그녀가 당장 눈앞의 상황만 보고 빈털터리가 된 상황에서 그나마 돈이 될 수 있었던 몸에 걸친 것들을 팔아 몇 푼의 돈을 쥐었다면 그날 저녁의 배는 불릴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갑옷을 잃은 셈이 되었을 것이다. 재스민의 모습을 보면서 남산골 딸깍발이를 연상했다면 너무 과한 생각일까?
재스민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존감을 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 하나 의지할 곳이 없는 입장이지만 그녀에게 다소간의 삶의 안락함을 줄 수 있는 이에게 스스로를 바겐 세일하지 않는다.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혼잣말을 하면서 자기를 위로할지언정 타인에게 값싼 동정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그녀의 고집스러움을 볼수록 그녀에 대한 연민은 커져만 간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파렴치한 일을 여러 번 자행하면서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먹고살려고."라는 말을 들으면 순간은 "오죽하면......."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간에 본인에게 부끄러우면서까지 한 일이 과연 그 자신을 얼마큼 시련에서 구제해 주었는지, 또한 인간이 본인의 가치를 스스럼없이 버리게 만드는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하는 요즘이다.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재스민은 그나마 본인에게 닥친 시련 속에서도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향유했던 존재였다는 것은 나름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존재의 가치조차 존중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도 분명 우리 사회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천부인권의 가치를 갖고 태어나는 만큼 어느 누구라도, 그 스스로라도 인간 존재의 가치를 함부로 폄하할 권리는 없다. 자기를 포기한 자를 존중해 주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재스민에게 박수 치는 이유는 그녀가 그녀 인생의 최고의 위기일 수도 있는 순간에 결코 자기 가치를 함부로 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새롭게 시작될 미래를 희망하고 있음이다. 혼잣말을 할 정도로 외롭고, 술이 아니고서는 버틸 수 없는 스트레스를 마주하는 그녀는 자신의 시련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의연하게 버텨낸다. 남이 보지 못하는 물 밑으로는 쉴 새 없이 발을 놀릴지언정 수면 위로는 고고한 아우라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노력과 태도는 분명히 그녀를 현재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