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팀 버튼의 옷을 입은 영화는 굳이 감독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팀 버튼스러운 영상으로 눈을 사로잡았고(이 영화의 감독은 제임스 보빈이다), 영화의 주제는 매우 클래식한 교훈을 준다. 인물들의 캐릭터는 새롭지 않다. 원제는 Alice throught Looking the Glass 이니 '거울나라의 앨리스'라는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라임을 맞춘 듯한 번안 제목도 좀 이상하긴 하다. 사실 크로노스피어를 훔쳐 과거를 여행하는 앨리스의 활약에 빠져있는 영화 중반부까지는 영화 제목이 좀 미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긴 한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의 과거에서 어른이 된 하얀 여왕이 과거의 실수를 번복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영화 영화 제목이 갖고 있는 은유가 풀리면서 클래식한 영화의 주제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답답한 현실 속의 문제가 있다. 과거가 나의 발목을 잡아 내가 오고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될 때 말이다. 나의 미래를 스스로 만드는 현실을 살고 싶지만 과거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 현실의 나는 마치 과거의 현신같은 존재라 생각이 될 때 말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상황이라면야 참으로 답답하고 안쓰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동정이 들겠지만 그 삶이 개인적인 범위를 벗어난 인생이라면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 갇혀 현재를 외면하고 있으니 이는 현재의 문제 뿐만 아니라 현재가 만들어 낼 미래도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결과가 자명하기 때문이다.
앨리스가 크로노스모어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사랑스럽고, 붉은 여왕이 크로노스모어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앨리스보다 더욱 절박하다. 그리고 '시간'은 그 두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한다.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다.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적 역사관이 고개를 드는 지난 정부부터 건국절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 지배 세력의 과거 친일 행적을 지우고 과거 그들의 행위를 건국 행위로 세탁하기 위함이다. 해방 이후 친일 세력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어진 우리의 현대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해 표류하고 있다.
가쓰라-테프트 밀약 이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가 미국 등 열강에 의해 합의 되면서 우리 역사는 미국의 정치적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왔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일본에서 독립하고자 한 독립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선언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유럽 중심이었던 힘의 축을 미국으로 옮기려고 했던 미국의 정치력 책략이었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코미디이다.
친일 세력이 해방 이후 친미 세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고, 이후 미국의 레드 컴플렉스를 안고 있는 개신교 세력과 결탁하여 세워진 대한민국 초대 정부 이후 한반도는 줄곧 갈등 역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소탕하는 친일의 선봉에 섰고, 이후 남로당 활동을 세탁하기 위해 노골적인 친미와 공산당 척결에 앞장을 선 것은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 뒤로 줄을 선 많은 친일-친미 세력이 과거를 세탁할 수 있는 방법으로 건국절을 제정함으로써 그들이 세운 초대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으로 신분을 세탁하기 위한 나름의 논리인 것이다. 현재의 위정자들, 우리 사회의 지배 세력들이 부끄러운 과거를 숨긴 채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 세대를 위한 용비어천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앨리스와 붉은 여왕에게 말하듯이 스크린 밖의 우리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역사는 대칭적 시점에서 나의 민낯을 보게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붉은 여왕의 비뚤어진 현재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과거를 후회하는 하얀 여왕은 "그때의 사고가 없었더라면"하고 후회하지만 정작 과거로 돌아간 이후 후회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순간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한다. 후회하는 현재를 살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수시로 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한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로 돌아와 과거의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사과하며, 화해를 시도한다.
과거로 돌아간 붉은 여왕이 현재의 자기를 과거에 노출하는 순간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습까지 박제가 되는 장면은 '그'의 말로 설명된 주제를 시각화 해서 표현해 주고 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말 많은 민정 수석을 붙들고 있는지, 미국이 중국을 향한다고 얘기한 사드를 왜 굳이 중국용이 아니라 대 북한용이라 우기며 한반도에 배치하려는 것인지. 절대로 레임덕이 없다고 믿고 싶은 대통령은 현재의 시점에서 드러나는 과거의 문제들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은폐하고 포장하려는 모습이 마치 붉은 여왕의 모습처럼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마치 본인의 대통령직 수행은 제 아버지의 잘못된 과거를 포장하기 위한 일생의 사명인 것처럼, 또한 본인의 목을 쥐고 있는 무리들의 배신을 막으려는 듯한 발버둥처럼 보인다. 단지 5년 기한의 정부가 하는 일 중 가장 비중을 두는 일은 부끄러운 현대사의 진실을 감추고, 제 입맛에 맞게 미화하려는 것 밖에는 안 보이니 큰일이다.
과거 우리 정부는 용감하게 현실적인 문제를 대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감내하고서라도 우리 사회의 곯아 있는 부분에 과감히 메스를 들이댈 수 있는 용기를 보였다. 과거로 돌아간 하얀 여왕은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한 순간 과거를 바꾸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과연 누가 어떤 자격으로 역사를 바꿔 현재를 입맛에 맞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부끄러운 과거는 이미 일어나 버렸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적 판단에 따라 그것을 평가받고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수반되는 정의롭지 못한 일을 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뒤돌아 봤을 때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혹은 설사 나는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지라도 현재 시점의 평가가 그것은 옳지 못한 결정이었다고 판단했을 때는 현재의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에 의해 과거를 반추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앨리스가 아버지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집을 저당 잡혔다. 집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배를 팔아야 한다. 과거를 놓치 못한 앨리스는 아버지의 배를 파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거울 나라에서 돌아 온 앨리스는 과거를 놓고 현재를 살기로 결정한다.
이전 앨리스가 아버지의 꿈을 위해 사는 과거 속 현재를 사는 모순된 삶을 살았다면 이후의 앨리스는 현재의 삶을 사는 현실의 앨리스로 한 단계 발전된 성숙한 삶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과거를 보면서 현재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함은 사실 우리가 유치원 때부터 배웠던 매우 본질적인 고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