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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화 Sep 12. 2016

카페 소사이어티

인생? 뒷담화, 스캔들, 루머, 가십

인간의 인지 능력의 주역은 '언어'이다. 인간의 언어는 매우 유연해서 몇 개의 단어와 어조만 가지고도 삶에 필요한 필수적인 정보 전달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 진화한다. 그리고 그 진화의 목적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인간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소문을 전달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이론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무리 내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보다 섬세하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원시적 형태에 머물지 않고 발전해야 했다.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제는 소문 혹은 정보의 생산과 전달과 소비가 더욱 자유로워졌다. 


영화는 바비의 할리우드 시절과 뉴욕 시절로 나뉜다. 전반부의 바비는 소문의 소비자였다면(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소비자는 아니었다) 후자는 소문의 생산자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본다면 전반부는 소문의 생산자가 될 바비의 제작 과정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전반부의 바비는 그의 형이나 누나 같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만큼의 흥미로운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없다(형은 갱스터, 누나는 공산주의자의 아내다). 본인 스스로도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는 따분한 인생을 바꿔보기 위해 할리우드로 삶의 터전을 옮기지 않았는가 말이다. 

소심하고 성실한 바비는 화려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을 초연하게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동경하기보다 허무하게 보는 보니(심지어 예쁘기도 하다)를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도 얼마나 성실하고 모범적인지 도저히 뭇사람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자극적인 요소는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들의 사랑에 다소간의 장애물이 있지만 바비의 성실한 사랑으로 이를 잘 극복해 낸 이 커플이 원만하게 사랑을 잘 키워간다면 또 그럭저럭 한 이야기로 끝을 냈겠지만 드디어 이들의 삶에도 자극적인 요소들, 남들의 흥미를 돋울만한 사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과거에는 정보(폭넓게 '정보'라고 하자)의 생산자와 전달자, 소비자의 구분이 나름은 명확했다. 적어도 스스로 자기의 사생활을 드러내며 스스로에 대한 '뒷담화(?)'의 거리를 노출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다.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생산, 전달, 소비를 동시다발적으로 실행한다. 본인 자신을 스스로 상품화시켜 노출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시선으로 봐 주십사하고 오픈을 했어도 보는 이들에 따라 시선과 평가가 달라지니 그 확산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나에 대한 정보는 나 조차도 생소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제의 나와 공개된 나의 정체성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보여지는 나의 정체성을 흠모한 나머지 실제의 자기를 부정하는 현대병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인류가 만들어 낸 현대성의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지 발전된 사회가 준 풍성한 삶의 다양성이라고 해야 할지는 아마도 이후 세대가 평가할 일이기는 하나 현대인들은 이런 모습을 가진 다채로운 사회에 적응하고(때로는 적응이 힘들어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나름 즐기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영화를 전반적으로 보면 상당히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우디 앨런 할배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겉으로 보기엔 경쾌하고, 즐거운 삶의 단편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인간 사회의 조롱거리들이 가득하다. 

돈과 명예에 가치를 건 겉치레가 요란한 삶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아주 양호한 편이다. 문제는 그런 삶을 비판하나 심적으로는 갈망하는 인간의 이중성이 보였고, 소소하게 등장하는 불륜과 섹스 스캔들, 살인, 폭력, 가치관의 갈등 등은 인류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며 절대로 끝나지 않을 '뒷담화' 거리들이다.

sns에 과감하게 자신의 삶을 오픈하면서 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의견을 덤덤하게 보기 시작하다가 자칫 나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발작하면서 '왜 귀한 시간을 싫어하는 사람 욕을 하면서 낭비하느냐'며 고상한 척 볼멘소리를 내는 sns 스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싫은 사람 꼬투리 잡아서 욕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오락거리인 줄 진심 너는 모르는 것이냐?" 이미 당신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예상을 하고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린 것이니만큼 어떠한 칼질도 감내해 낼 각오를 했던 것이 아니었느냐? 한 발 더 나아가 당신이 원하던 것은 불특정 다수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었느냐. 만약 본인이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방향의 피드백이 온다면 그것은 콘텐츠를 선별하는데 센스가 부족한 본인을 먼저 탓하는 게 순서이다. 

어떤 사회든지 간에 완벽한 긍정은 없다. 부정적인 것들이 섞여있는 것은 정상적인 모습이다. 또한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더 도드라지고 이것이 우리 사회 전반을 압도할 경우 이것은 자체 정화를 할 수 있는 힘이 발휘될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는 인류의 모습이다. 다른 시선에 의해 왜곡되고, 거짓이 유통되고, 변명을 하고, 진실을 밝여내느라 고군분투하고 결국은 어쨌든 결론이 맺어지고, 일련의 과정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의 거름이 되고.

 


영화의 엔딩은 모든 핫한 소문의 발생지에서 소문을 생산, 전달, 소비하는 주동자들이 모여 happy new year!로 마무리된다. 

인간의 말,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의미가 규정되면서 인류는 다양해지고, 삶은 풍성해진다.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잘 드는 칼로 도려내듯 매끈한 인생이 과연 몇이나 있느냔 말이다. 당장 어제오늘 나의 삶을 돌이켜 보더라도 두 눈이 질끈 감아지고, '앗!' 하는 소리가 무의식 중에 새어 나올 정도로 뭔가 삐끗했던 일들이 소소히 있고, 분명 오늘 혹은 내일은 밤에 아무 일 없이 자다가 이불 킥 할 과거의,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 것 같은 부끄러운 일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런 소소한 것들,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 갑남을녀들의 일상이 모여서 속닥거리고, 북적거리면서 이루어진 것이 인류의 발전사이다. 거창한 뭣도 없다. 다만 태어난 이상 주어진 시간의 삶을 나름 즐겁고 잘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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