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예술은 이미 그 고고한 권위를 벗어버린 지 오래다. 예술의 가치가 여러 사람들에게 소통되고 공감되면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누구나 올려다 보기 어려운 높은 곳에 존재하는 예술이란 사실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술이 권위를 벗고 대중의 눈높에 맞춰 누구나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자리로 옮겨왔다는 것은 정해진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든 권위를 가진 이들의 강력한 보수성과 힘은 다수의 대중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함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권위를 만들어 왔고, 대중들의 부러움을 샀기에 충분했으며, 때때로는 대중들의 꿈의 리그로 그 곳에 편입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게 하기도 했다. 이런 중에 예술은 충분히 고급스러운 가치를 지닌 대표적인 가치였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릴 적부터 교육된 심미안과 교양과 선천적으로 타고난 감수성이 아니고서는 감상할 수 없는 특유의 아우라를 가진 것이 예술이었다. 그런데 그 예술이 pop art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내려왔'을 때 이것은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예술의 다른 장르들 역시 권위를 버리고 대중과 눈을 맞추면서 대중은 예술을, 예술은 소통과 공감을 통해 폐쇄적인 가치가 아닌 개방적이고 새로운 가치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그 권위라는 것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참으로 여유 있고, 쿨해 보이며, 멋있어 보이는 일인데 이것은 스스로 챙기려는 일은 정말이지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꼴불견이라는 점이다. 누가 봐도 다른 이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고, 힘이 있고, 권위를 갖고 있는데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전전긍긍하며 자리를 움켜쥐는 모습은 비웃음을 사기 충분하다. 대신 우리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스스로 낮은 자세를 취하며,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듣고, 타인의 삶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기꺼이 신입 사원과 동등한 룰로 게임을 하는 회장님이 멋있고, 학생에게 새로운 IT 제품의 조작법을 배우는 교수가 멋있고, 시골 촌부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통령이 멋있고, 저녁 식사 후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는 가장이 멋있다. 그들의 모습에 감히 체면과 권위를 얘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체면과 권위 위에 있는 숭고한 카리스마의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놓칠까 걱정하며 힘주어서 움켜 잡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마디로 여유가 있다. 그리고 역시 멋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거보다 교육의 기회가 다양하게 많다. 어떤 분야든 정보는 개방되어 있고 원하는 정보는 누구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 이에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던 과거와 달리 수평적인 인간 관계가 형성이 되어있다. 따라서 굳이 "나는 너희 대중들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인간이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곧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만다. 힘들여 가벼워지기를 노력할 수는 있어도 힘들여 목에 힘 줄 노력은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영화 '킹스맨'은 영화의 서사 구조라든가, 에피소드라든가, 영상이라든가 뭐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유치하기까지 하다. 뭔가 언발란스한 두 주인공의 캐미는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의 대항하는 악역 역시도 코믹하다. 그들의 꾸미는 인류 개조의 계략 역시 다분히 소년 만화스러울 뿐이다. 이런 영화에 영국의 유명 배우 콜린 퍼스가 출연한다. 콜린 퍼스 하면 정말 다분히 보수적인 영국적인 배우로 유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영화 밖에서의 그의 이미지도 그렇지만 영화 안에서도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보수적 가치를 고수하는 그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얼뜨기 신입 비밀 요원을 교육하고 서포트하는 역할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유명 대사를 남긴 그는 사실 영화에서 신사적이지 않다. 매우 무자비하다. 그가 얘기한 매너는 실은 그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새로운 스파이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이 B급 정서의 영화에서는 기가 막힌 블랙 코미디들이 무수히 등장하는데 이것들을 찾아 보는 것도 재밌다.
주인공 애그시의 파트너인 코가 납작하고, 오다리인 작은 퍼그의 이름은 JB다. JB가 무엇이 줄임말이냐는 질문에 나오는 대답들이 걸작인데 "제임스 본드, 제이슨 본?", "ㅋㅋㅋ 잭 바우어는 절대 아니다." 기존에 있었던 아니 '있었던'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스파이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작품들의 주인공들을 열거하면서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단호한 에그시의 대답과 이어 등장하는 JB의 뚱한 표정은 강력한 한방이다(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는 끼지도 못한다). '007', '본' 시리즈, '24'의 진지하고 보수적인 스파이의 이미지를 단박에 부숴버리는 한 수인 납작한 퍼그 JB. 심지어 퍼그 JB의 존재는 인류를 구할 뉴 에이전트 에그시의 탄생을 결정하는 엄청난 역할을 한다.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 잭 바우어 등이 겨우(?) 국가나 테러리스트를 진압하는 자잘한(?) 임무와는 차원이 다르다. 뉴 에이전트 에그시는 무려 인류를 구한다. 이 얼마나 숭고한 임무인가 말이다.
사실 이 외에도 기존의 엄숙한 클래식을 조롱하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007 하면 떠오르는 샴페인 볼렝저 대신에 훨씬 대중적인 모에 상동이 등장한다. 힙합 스웨그를 잔뜩 묻히고 있는 악당 밸런타인은 블랙 타이 차림의 해리 하트에게 샤또 라피트를 대접하는데 함께하는 음식은 맥도널드 햄버거이다. 007의 제임스 본드 스타일 마티니도 킹스맨에서는 여지없이 파괴되는데 보드카 마티니를 젓지 않고 흔들어서 마시는 방법 대신 진을 넣고 보드카를 바라보며 진만 저어 마시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진만 마시는. 엄밀히 말하면 마티니가 아니다(마티니는 일반적으로 진과 베르가뭇을 섞어 올리브 열매를 가니쉬로 곁들여 마시는 칵테일이다). 또한 스파이물에 반드시 등장해 섹시 코드를 완성했던 여성 캐릭터는 킹스맨에서 완벽하게 무너진다. 이런 코드들은 모두 강하게 자리매김하면서 나름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비꼼이라고 할 수 있다. 탈 권위의 코드인 것이다.
킹스맨에 등장해 기존의 권위를 파괴하는 에피소드들이 단순히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 영화는 불만쟁이의 대책 없는 불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킹스맨은 그가 비틀어 보이고 있는 대상들을 꼼꼼하게 공부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대중에게 공감을 주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파악해 내고 그것을 감각 있게 재해석하면서 웃음의 코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대상을 비틀어 낸 것은 단순한 비난과 무시가 아니라 고전을 바탕으로 하되 새로운 시각을 더해 재해석한 다른 선상의 새로운 것이란 것이다. 대중과 소통되는 코드무게를 버리고 가벼움을 더해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고전과 현대적 유머가 만들어 낸 콜라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은 '킹스맨'을 보고 '007'을 연상할 수는 있지만 '007'의 카피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오리지널의 명성을 입고 흥행하기 위해 생각 없이 찍어 만들어 낸 짝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엘리트적이고,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한 영국제 신사가 진지함 대신 웃음을 들고 다가 온 친근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007 시리즈의 오랜 팬들은 알 것이다. 새로운 편이 개봉하게 되면 우리는 007에 담겨진 많은 코드를 읽어내기 위해 피곤하기 까지 한 지적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007 시리즈는 단순한 영화가 아닌 영국의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과장하면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문화 상품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배우 콜린 퍼스의 '킹스맨' 출연은 그 자체로 상징일 수 있다. 콜린 퍼스가 킹스맨에서 홀로 어울리지 않은 블랙 타이 차림으로 혼자 진지함을 연기하는 언발란스한 상황을 연출해낸다고 해도 관객은 이를 영국의 대표 배우의 추락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권위를 인정받고, 존귀함을 나타내고 싶다면 과거의 언어를 버려야 한다. 당신이 쌓아온 순간은 이미 과거이고 당신은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 살고 있는 당신이 지금 당신이 이룩한 것을 뽐내고 싶다면 현재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과거를 고수한다면 외로움과 조롱은 물론이려니와 목 디스크에라도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