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과 인간의 행복 사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 투 마더스

by 백경화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끝나야지만 끝나게 될 갈등이고, 질문일 것이다. 관습이 인간의 행복을 제한할 수 있을까? 관습이란 한 사회가 오랜 시간을 거쳐오면서 사회 구성원들 간의 합의에 의해 이룩된 문화적 산물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가 이루어진 만큼 그것은 사회적 안녕과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을 전제로 한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관습일지라도 지금까지 조상의 유산으로 내려온 관습들은 시간을 초월한 인류의 정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문득 의문이 든다. 사회가 변하고 사람들이 변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변하고 행복의 척도가 변한 현대 사회에서도 과연 과거에서부터 만들어져 내려 온 관습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용기 있게 벗어날 수 있을까?


가깝게 보자면 세계적으로 지루한 싸움으로 여겨지는 동성애의 문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뜨거웠던 간통죄의 문제 등은 이러한 질문에 가장 단순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개인적인 성적 취향이나 상호 간의 감정적인 문제가 과연 관습 그리고 국가 권력이 나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문제인가 말이다. 오히려 관습이나 국가 권력의 오지랖이 사회 부적응자와 범죄 경력을 양성하고 있진 않는가? 더 나아가 과연 이러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 의지와 행복할 권리를 충분히 지켜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관습과 법의 시작이 사회의 안녕과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한 장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과거로부터 이어 온 것들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 것일까?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여성 간의 동성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투 마더스'는 친구의 아들과(혹은 엄마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중년 여성과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성애든 나이 차이가 많은 이들간의 사랑이든 우리 사회에서는 예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인 것만은 맞다. 동성애의 경우 이제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많이 되어왔다고 할지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성적 취향에 대한 거부감을 거리낌 없이 들어내는 이들이 많은 게 사실이며, '투 마더스'에서 볼 수 있는 관계의 경우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뒷목을 잡고, 거품을 물며, 삿대질을 해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관계가 적절한가 부적절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관계가 그들 스스로 결정하고, 타협한 관계인가이며 그러한 관계의 지속이 그들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이며, 더 나아가 그들의 관계가 정말로 그들 주변을 불행하게 변화시켰는가 하는 문제이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의 엠마와 아델 두 커플은 일반적인 이성 커플과 다를바 없이 사랑한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섹스신이 스크린에서 보기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행위들이 굳이 동성 관계이기 때문에 더 자극적으로 묘사했다거나 음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저 존재와 존재일 뿐이며 그 둘은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며, 사랑하고, 서로의 시간을 공유할 뿐이다. 물론 이들은 그들 서로의 문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용서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들은 결국에는 이별하지만 이 역시도 호감을 가지고 관계를 맺고, 뜨겁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갈등하지만 결국에는 헤어지는 흔한 연애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투 마더스'의 경우에는 그 설정이 더 자극적이기는 하다. 엄마뻘 되는 중년 여성과 아들뻘 되는 청년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저 자극적인 스캔들일 뿐일테지만 그들의 관계가 여자는 엄마의 절친이며, 남자는 절친의 아들이며 더 나아가 이들의 관계는 비틀려지 듯이 이런계가 스와핑 되기도 한다. "이런 상것들!"이라면서 버럭 화가 날 정도다. 막장에 막장에 이런 막장이 없을 것 같고, 이런 강도 높은 불륜은 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 둘의 관계를 보자면 이안은 로즈에게 사랑을 느꼈고 고백을 했고, 로즈는 이안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은 각자가 남자와 여자였을 뿐이었을 뿐 친구의 아들이라거나 엄마의 친구였거나의 조건은 생략된 경우이다. 누구도 강제적인 요구가 없었고 그들은 그들의 관계로 행복했다. 심지어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 서로의 아들 그리고 엄마 역시도 그들의 관계를 인정한다. 이전에 톰(로즈의 아들)은 분노와 호기심으로 릴(이안의 엄마)을 유혹하지만 이들의 관계를 금방 끝이 난다. 전자의 입장과 달리 후자의 경우는 관계의 목적과 시작이 다르므로 같이 얘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묻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조건이 사회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관계라고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교류에 누군가가 돌을 던지고, 침을 뱉을 수 있을까? 그들의 행위 자체가 스스로의 결정에서 나왔고, 그들의 관계에서 합의된 관계라면 과연 그들 외의 타인이 그들을 무엇이라고 어떤 잣대를 가지고 비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서로 좋다면 모든 관계를 다 괜찮다고 얘기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낯설게 생각하는 것들의 이유가 전혀 고민되지 않고 관습적으로, 관성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는 생각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과연 옛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습적 정의가 현대 사회의 개인의 행복을 억지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고민은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 의지와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사회는 그것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물론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관습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존재하겠지만 이것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인류의 발전이 아닌가 한다.

인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 역시 변화되고 있다. 어제까지 문제없이 받아들여 온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의 삶에 문제가 된다면 굳이 그것을 그대로 고수할 필요는 없다. 오늘에 맞게 변화시키고 합리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인류가 진화한 이유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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