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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화 Nov 13. 2015

'모' 아니면 '도'
세상이 그렇게 간단했던가?

The Lobster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마주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긴 하다. 불편하지만 내가 내 생각에 대한 신념이 있는 만큼 그 역시도 나와는 다른 의견에 대한 신념이 확실할 것이다. 만일 상대의 의견이 나와는 다른 의견이라는 생각이라면 지루한 토론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될 것이고. 상대를 쿨하게 인정하든, 아니면 끈질기게 상대를 설득하든 간에 어쨌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마주하는 일은 힘들고 피곤하다. 그러나 나와 생각이 딱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고로 세상을 단순하게 '모' 아니면 '도'로  단순화할 수 없다. 


 짝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새로운 짝을 찾기 위해 커플 메이킹 호텔에 숙박하며 45일 안에 짝을 만들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동물이 되어 나가야 한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짝이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짝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회는 주류이고 주류 사회에 존재하기 위해 사람들은 45일 내게 맞는 짝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한다. 물론 주류 사회에 반기를 든 비주류 사회도 존재한다. 그들은 가족들에게조차 자신들이 짝이 없는 싱글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으며 숨어 살아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커플 메이킹 호텔에 투숙객들이 짝을 찾는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벌이는 사냥 게임의 사냥감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요한 규칙. 외톨이 집단에 편입된 이상 절대로 그들 안에서 짝을 만들 수 없다. 


 주류 사회의 편협함이 싫어 비주류인 외톨이 사회로 옮겨갔다고 해도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영화 'The Lobster' 안의 세상이다. 즉 어느 사회에 있든지 간에 그 사회가 추구하는 하나의 가치만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그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동물이 되거나 혹은 죽어야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의 존재가 누릴 수 있는 개인적인 기쁨 따위는 없다. 단지 사회라고 하는 정해진 시스템 안에 부속품으로만 존재된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라는 거대 시스템을 원활히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부속들은 단지 그 역할에 맞게 실행되는 가치로만 살아갈 수 있다.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커플이 되어야 하고(이성이든 동성이든 관계는 없다.) 커플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사회에서는 자식이라는 서비스 품목이 제공되기도 한다. 그렇게 짝지어진 관계들은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를 유지시키는 하위 시스템의 역할을 수행한다. 주류 사회의 혜택을 누리면서 현 시스템의 모순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렇게 짝짓기 사회는 유지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충격적인 것은 주류 사회의 모습보다 비주류 소수자들이 모인 사회의 모습이다. 단지 짝이 없이 살아갈 뿐 편협함은 주류 사회의 인간들 못지 않다. 짝짓기에 실패한 존재들이 모인 집단이기에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짝짓기를 하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직 차원의 폭력이 합법적으로 행사된다.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은 그들을 내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 단지 겉모양만 다른 이란성 쌍둥이 같은 모습이다. 영화 속 세상은 오직 한 가지의 명제만 존재할 뿐이다. 짝짓기 대상의 유무가 그것이다. 


 'The Lobster'의 세상에서는 서로의 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란 둘의 공통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호텔에서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비정한 여인을 짝짓기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그녀의 비정함을 흉내 내지만 결국 연극이었음이 들통이 난다. 이후 외톨이들의 조직으로 숨어들면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우연히 그녀가 근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데이비드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 외톨이 조직의 제 1의 금기를 어긴 이 커플은 결국 여자가 장님이 되는 처벌을 받게 되고, 둘은 도망을 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데이비드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하려는 시도를 한다. 미션 수행의 결과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 결과에 따라 하나의 세계가 파괴되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될지, 아니면 불합리한 기존의 세계가 유지되는지 결정이 나게 될 것이다. 


 서로 다른 타인이 만나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알게 되고 공감하게 되는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는 신뢰가 생기고, 사랑이 생긴다. 이러는 과정을 겪으면서 기존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존재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영화 'The Lobster'의 세상 속의 폭력성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게 되는 시도 자체를 거세시켜 버림으로써 시작된다.  호텔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다양성은 말살이 되고, 인간은 오로지 짝을 맺고, 교미를 해서 사회를 유지시키는 존재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 반대의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소수자들은 스스로를 불임의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짝짓기에 실패한 루저들을 더 이상 생산해내지 않으려는 듯도 보인다. 누군가가 정해 놓은 한 가지 기준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유지되는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처참한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데이비드가 부디 스스로 장님이 되질 않길 바란다.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그녀를 사랑한다는 개인의 진실이지 체제가 만들어 낸 규칙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와 달리 그는 앞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녀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 그가 권력이 정해 놓은 규칙을 그 스스로 깨는 용기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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