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 교사의 점심시간은 정신이 없었다
엄마의 점심시간은 정신이 없었다. 나물이 먹기 싫어 자는 척을 하는 아이, 10분 동안 입에 물기만 하고 씹지 않는 아이, 싫다고 토하는 척을 하는 아이들로 다양했다. 여섯 살 꼬맹이들을 앞에 두고 엄마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앉은키보다 한참 낮은 책상 위에 놓인 본인 밥은 쳐다보지도 제대로 씹지도 않았다.
엄마는 보육교사다. 방학 때 나는 어린이집으로 엄마를 도와주러 가곤 했다. 가장 힘든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식습관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아이들이 떼를 썼다. 식사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은 양반이었다.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 편식이 가장 골치였다. 초짜인 나와 달리, 엄마에겐 본인만의 방식이 있었다.
엄마는 먼저 관찰을 했다. 아이들이 남기는 음식을 보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아갔다. 그래서 다음 배식 때는 그 아이가 싫어하는 음식은 조금 적게 주고, 좋아하는 음식은 좀 더 주었다. 아이들마다 맞는 규칙을 만들어갔다.
다음은 단호함이었다. 선호에 따라 배식 양을 조절했기에, 웬만한 음식은 골고루 먹게 했다. 밥을 먹는 동안 엄마는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말을 했다. 나물도 먹어봐야지, 오늘은 두 번 만 먹자. 몇 번이고 어르고 응원하며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게 했다.
그래서 엄마는 새학기만 되면 목이 쉬었다. 손을 많이 써 이른 나이에 얻은 퇴행성관절염도 심해졌다. 나는 속상했다. 싫다고 하면 그냥 놔두고 대충 할 수 없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엄마는 그러게, 그럴까 보다 말만 할 뿐이었다.
식습관을 잡아주는 과정에서 어떤 아이들은 엄마를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 학부모가 항의를 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무척 속상해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원하는 대로만 하게 놔두지 않았다. 어김없이 졸업할 때가 되면 그 아이는 식사 시간에 의젓하게 앉아 밥을 먹었고, 싫어하던 나물을 한 입 했다. 스스로 재킷 단추를 잠그고, 친구들의 장난감을 뺐지 않고 어울려 놀았다. 26년간 엄마는 한결같았다.
나는 엄마가 무엇 때문에 열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졸업한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어린 나이에 만난 아이들은 엄마를 기억하지도 못했다. 10년 전 월급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박봉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몇 번 듣지 못했다.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을 때였다. 엄마는 그곳에서 예전에 가르친 아이를 봤다고 했다. 6살이던 아이는 어느새 중학생이 됐다. 역시나 그 아이는 엄마를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는 저녁 시간마다 그 아이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학교에 뛰어가더라. 횡단보도 신호도 안 됐는데 건너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본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자를 아직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물었다. 애들이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는 데 지칠 때가 없었느냐고. 엄마는 짧게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다. 그러나 할머니 혼자 세 아들딸을 키우는 집의 장녀였던 엄마에게 대학이나 교사의 꿈은 사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인쇄소의 경리로 취직했다. 미스 김, 커피 부탁해라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다. 엄마는 밤마다 기도를 했다. 선생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신께 빌었다. 그때 만난 것이 어린이집이었다. 대학에 가지 않고도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그곳에서 본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 기뻤다.
26년 전 만난 첫 감동으로 엄마는 보상 없는 이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언젠가부터 딸보다 어린 이십 대 초반 선생님들과 일할만큼 오랜 기간이다. 엄마는 이제 막 시작하는 선생님이 오면 해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잠깐 봐주는 사람이 아니라 보육 교사다. 전문적으로 가르쳐 올바르게 성장시킬 책임이 있다고 말이다. 엄마는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목이 쉬어가며 아이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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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엄마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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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이 폐업해 어쩔 수 없이 일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생님 일을 사랑한
보육 전문가, 우리 엄마의 앞날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