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심리

by 안개꽃 눈송이

낡은 필름 속에 고인 침묵은 늘 같은 시각에 재생되었다. 푸른 새벽공기는 잊힌 기억을 끌어올리는 힘을 지녔고, 좁은 방 안 낮은 조도 아래로 밤의 무게가 내려앉았다. 책상 구석에 놓인 오래된 사진첩이나 누군가 남기고 간 짧은 쪽지를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과거는 스스로 걸어 나와 나를 마주했다. 그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밤의 의례였다.

그 시절의 나는 오만했다. 잘해준 사람에게 당연히 굴었고, 타인의 선의는 공기처럼 늘 곁에 있으리라 믿었다. 화난 순간에 던진 말들이 상대의 마음 어디쯤에 박혀 흉터를 남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나는 그것들을 금세 증발할 안개로 착각했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붙잡지 않은 것은 무심함이 아니라, 무너질 것 같은 자존심을 지켜내려는 비겁한 저항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충분할 줄 알았다. 소중한 시간을 미뤄두고, 진심을 늦게 전하며, 괜히 자존심을 세우던 날들. “나중에,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 기만적인 약속들이 쌓이는 동안, 내 곁의 온기들은 하나둘 식어갔다.

밤이 깊어지면 천장 위로 영사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재생되는 기억의 필름 속에서, 나는 왜 그리도 서툴렀을까. 등 돌린 뒷모습 위로 떨어지던 가로등 불빛은 이제야 가슴 아픈 잔상으로 남았다. 허공을 더듬는 손끝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늦게 도착한 진심은 주인을 잃은 편지처럼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자존심의 성벽은 후회라는 파도 아래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무너짐이 나를 다시 세웠다. 텅 빈 손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눈앞의 사람을 온전히 마주 보는 법을 배웠다. 후회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안의 모난 구석을 깎아냈고, 그 자리에 다정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소년이 어른의 외투를 입는 방식은 언제나 가혹했다. 무언가를 완전히 잃어버린 뒤에야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비효율적인 성장. 하지만 그 늦어버린 깨달음이야말로, 무채색이었던 세계를 깊고 입체적인 질서로 채워가는 첫 걸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잘해준 사람에게 당연히 굴었던 순간, 화난 마음에 함부로 던진 말,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않았던 무심함, 소중한 시간을 미뤄둔 게으름, 진심을 늦게 전한 후회, 괜히 세운 자존심, 그 마음을 몰라주었던 무지. 그것들은 모두 내 안의 그림자였고, 지금의 나를 빚어낸 재료였다.

새벽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따뜻해졌다. 후회는 끝내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다시 세워, 이제는 눈앞의 사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떠나는 뒷모습을 붙잡을 수 있도록, 진심을 늦지 않게 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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