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혁의 핸드폰 갤러리에는 사진이 4,200장 있었다.
그중 절반이 해외였다. 다낭의 수영장, 오사카의 골목,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서 찍은 셀카. 배경은 매번 달랐지만 표정은 늘 같았다. 살짝 올린 턱, 입꼬리는 한쪽만. 연습한 표정인지 타고난 표정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당근 모임에 처음 나간 날, 준혁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 여행 좀 다녔어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지현은 그날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80년생, 이혼 후 혼자 사는 여자. 모임에 나온 건 딱히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집이 너무 조용했다. 토요일 오후 세 시의 거실이 너무 넓었다.
준혁이 다낭 사진을 보여줄 때 지현은 웃었다. 예의상이었다. 그런데 준혁은 그 웃음을 다르게 읽었다.
핸드폰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거 제가 직접 찍은 거예요. 골든아워 맞춰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순간을 붙잡는 것 같았는데, 결국 다 똑같은 표정이더라고요.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어요.”
준혁은 사진을 넘기면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바다 앞에서 혼자 밥 먹어본 적 있어요?"
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요?"
"네."
준혁은 잠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낭 해변가 작은 식당 사진이었다. 플라스틱 의자, 낡은 파라솔, 그 너머로 수평선.
"거기서 쌀국수 한 그릇 시켜놓고 혼자 먹었는데요. 아무도 없고, 파도 소리만 나고. 그때 처음으로 — 아, 나 지금 살아 있구나, 싶었어요."
지현은 사진을 들여다봤다. 별것 없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부럽다."
말이 먼저 나왔다.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준혁이 웃었다. 이번엔 입꼬리가 양쪽 다 올라갔다.
"같이 가면 되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이었다. 지현은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귓가에 남았다.
준혁은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오사카 새벽 골목이었다.
"새벽 네 시에 혼자 걸은 골목이에요. 아무도 없고, 가게도 다 닫혀 있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좋은지."
"무섭지 않아요?"
"무섭죠. 근데 무서운 게 살아 있다는 거잖아요."
지현은 그 말을 씹었다. 오래. 무서운 게 살아 있다는 것. 이혼하고 나서 그녀의 삶에서 사라진 것들이 있었다. 설렘, 기대, 그리고 — 무서움. 언제부터인가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잃을 것도, 기다릴 것도 없어서.
"저는 여행을 못 가봐서요."
"왜요?"
"그냥 — 혼자는 용기가 없어서."
준혁은 잠깐 지현을 봤다. 그 눈빛이 어딘가 따뜻했다. 아니, 따뜻한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지현은 그 둘의 차이를 오래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날 밤엔 몰랐다.
"용기는 가면 생겨요. 가기 전엔 아무도 없어요."
지현은 다시 웃었다. 이번엔 조금 더 예의상으로.
그런데 준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진을 넘기면서 이것저것 설명했다. 현지 물가, 숙소 고르는 법, 혼자 여행할 때 외롭지 않은 이유. 말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 시끄럽지 않았다. 목소리가 낮고 천천히 흘렀다. 지현은 어느 순간 핸드폰 화면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준혁이 말했다.
"집 방향이 어디세요?"
"저는 버스 타면 돼요."
"저도 그쪽이에요. 같이 나가도 될까요?"
지현은 잠깐 망설였다. 망설이는 자신을 느꼈다. 그게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준혁이 편의점 앞에서 바나나우유를 두 개 들고 나왔다. 하나를 지현에게 내밀었다. 지현은 받으면서 웃었다. 이번엔 예의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 밤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준혁이 말했다.
"오사카 새벽 골목 얘기 기억해요?"
"기억하죠."
"그때 느낌이 지금이랑 비슷해요."
지현은 바나나우유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서운 게 살아 있다는 거라고 했잖아요."
준혁이 웃었다. 입꼬리가 양쪽 다 올라갔다.
"춥지 않아요?"
지현은 춥지 않았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이 일어섰다. 손을 내밀었다. 지현은 잠깐 그 손을 봤다. 잡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몰랐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알면서 잡았다.
준혁의 원룸은 작았다. 짐이 많지 않았다. 여행 가방이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벽에 핀으로 꽂힌 지도가 하나 있었다. 여러 도시에 빨간 점이 찍혀 있었다. 다낭, 오사카, 바르셀로나.
지현은 그 지도를 잠깐 봤다.
"다 가본 데예요?"
"대부분요."
"다음은 어디예요?"
준혁이 지현을 봤다. 대답 대신 웃었다.
지현은 시선을 거뒀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서운 게 살아 있다는 거라고 했던가. 그 말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말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준혁이 가까이 왔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손이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이 오히려 또렷하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였다.
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불을 껐다.
다음날 아침, 지현은 낯선 천장을 봤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준혁은 아직 자고 있었다. 지현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어깨가 드러났다. 창밖에 새소리가 났다.
이상하게 울고 싶지 않았다. 후회도 없었다. 그냥 — 조용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종류의 조용함이었다. 나쁘지 않은 조용함.
핸드폰을 봤다.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 당연했다. 새벽이었으니까.
커피를 끓였다. 두 잔.
준혁이 눈을 떴다. 지현을 보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커피 있어요?"
"끓였어요."
준혁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잔을 받았다.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
그 한 마디가 지현의 가슴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말이 아니었다. 온도였다.
그날 이후로 준혁의 연락이 잦아졌다.
지현도 핸드폰을 자주 봤다. 알림이 없어도 봤다. 있는 것 같아서. 있었으면 해서.
지현의 카카오톡 채팅창에는 준혁과의 대화가 237개 있었다.
처음 몇 개는 모임 공지 링크였다. 그다음엔 "오늘 재밌었어요"였다. 그다음엔 "편의점 같이 가요, 저 바나나우유 좋아하거든요"였다.
지현은 그게 데이트 신청인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오랜만에 누군가 말을 걸어왔고, 그 말이 따뜻했다. 가짜 따뜻함인지 진짜 따뜻함인지 구별하는 일이, 그 순간엔 중요하지 않았다.
준혁은 연락을 잘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안 했다.
지현은 사흘을 기다렸다. 일주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먼저 연락했다.
답장은 이틀 뒤에 왔다. "요즘 바빠서요 ㅎㅎ."
지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한참 봤다. 토요일 오후 세 시의 거실이, 모임에 나가기 전보다 조금 더 넓어진 것 같았다.
준혁은 당근 모임이 여러 개였다.
하나는 재훈의 모임. 하나는 3킬로미터 떨어진 동네 모임. 이 모임의 여자들은 서로 몰랐다. 준혁은 그 거리를 나름의 완충지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은 좁았다.
두 번째 모임의 유라가 첫 번째 모임의 혜진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유라가 혜진에게 연락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나 요즘 당근 모임 나가는데, 거기 준혁이라는 사람 알아?"
혜진은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응. 알아.
유라는 당근 모임이라는 걸 처음 해봤다.
친구가 권했다. 동네 사람들이랑 밥 먹는 거라고, 부담 없다고. 유라는 반신반의하며 나갔다. 83년생, 회사 다니고 혼자 사는 여자. 특별히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주말이 조금 길었다.
테이블에 앉았을 때 준혁이 맞은편에 있었다.
먼저 말을 건 건 준혁이었다.
"처음 나오셨죠?"
"네, 어떻게 알았어요?"
"좀 두리번거리는 것 같아서요." 준혁이 웃었다.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유라는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 첫마디였다.
음식이 나오고 자리가 풀릴 무렵, 준혁이 핸드폰을 꺼냈다. 유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또 여행 사진이겠구나, 하고. 요즘 남자들이 다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준혁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혼자 밥 먹는 거 좋아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편하긴 한데."
"편한 거랑 좋은 거랑 다르잖아요."
유라는 잠깐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구분이었다.
"그럼 준혁 씨는요?"
"저는 — 혼자 밥 먹는 게 좋았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말끝을 흐렸다. 유라는 그 흐린 끝을 자기도 모르게 붙잡았다.
"왜요?"
준혁이 유라를 봤다. 잠깐, 그러나 또렷하게.
"누군가랑 같이 먹는 게 더 맛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유라는 시선을 거뒀다. 밥을 한 숟가락 떴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별것 아닌 말인데. 별것 아닌 말이었는데.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 준혁이 말했다.
"저 이쪽 방향인데, 같이 나가도 돼요?"
지현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준혁은 그걸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생각하지 않았다.
걸으면서 준혁은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엔 바르셀로나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아세요?"
"사진으로만요."
"밤에 보면 달라요. 낮이랑 완전히 다른 건물이에요. 같은 건데 빛이 바뀌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게 — 사람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유라는 걸으면서 그 말을 들었다. 사람이 빛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것. 지금 이 사람이 어떤 빛 아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
"준혁 씨는 어떤 빛 아래서 다르게 보여요?"
준혁이 잠깐 유라를 봤다. 예상 못 한 질문이었다.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게 — 유라에게는 가장 솔직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면서 준혁이 말했다.
"번호 물어봐도 돼요?"
유라는 잠깐 망설였다. 망설이는 자신을 느꼈다. 그게 싫지 않았다.
번호를 줬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유라는 창밖을 봤다. 가로등이 흘러갔다.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메시지는 없었다.
그런데 열 분 뒤에 왔다.
— 잘 들어가셨어요?
유라는 웃었다. 짧게, 혼자.
답장을 보냈다.
모임이 네 번째 되던 날이었다.
준혁이 편의점 앞에서 바나나우유를 두 개 들고 나왔다. 하나를 유라에게 내밀었다.
유라는 받으면서 웃었다.
"이게 준혁 씨 시그니처예요?"
준혁이 멈췄다. 잠깐이었다.
"왜요?"
"그냥. 뭔가 — 준비된 것 같아서요."
농담처럼 말했다. 유라 자신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준혁은 웃지 않았다. 대신 유라를 봤다.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
"준비된 거 나빠요?"
"아니요." 유라가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오히려 좋은데."
준혁이 그제야 웃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했다.
준혁이 바르셀로나 이야기를 꺼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밤의 빛, 빛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들. 유라는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여행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언제 또 가요?"
"같이 가면 되죠."
지현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그런데 유라에게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나왔다. 준혁도 그걸 느꼈다.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여행을 가면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잖아요. 근데 사실은, 돌아오면 더 공허해져요. 그래서 또 가는 거예요.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순간마다 진짜인데, 지나고 나면 다 가짜 같아져요.”
유라는 바나나우유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저 여권 만료됐는데."
"갱신하면 되죠."
"갱신하면 — 진짜 가요?"
준혁이 유라를 봤다. 유라도 준혁을 봤다. 농담과 진담 사이 어딘가 였다. 그 경계가 밤공기처럼 흐릿했다.
준혁이 말했다.
"춥지 않아요?"
유라는 그 질문이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일어서면서 손을 잡았다. 먼저. 준혁이 아니라 유라가.
준혁은 잠깐 멈췄다. 이번엔 진짜로 멈췄다. 각본에 없는 순간이었다. 유라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요?"
준혁은 웃었다. 각본 밖에서.
준혁의 원룸 벽에는 지도가 있었다.
유라는 그 지도를 봤다. 빨간 점들. 다낭, 오사카, 바르셀로나.
"다음 점은 어디 찍어요?"
준혁이 유라 뒤에서 말했다.
"아직 모르죠."
유라는 지도를 손끝으로 짚었다. 어딘가를 가리켰다. 포르투갈이었다.
"여기는요?"
"좋죠."
"진짜로요?"
"진짜로."
유라는 돌아섰다. 준혁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둘은 키스를 했고, 조용히 서로를 음미했다. 그리고 불을 껐다.
다음날 아침, 유라는 낯선 천장을 봤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준혁은 아직 자고 있었다. 유라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벽의 지도가 보였다. 어젯밤 자신이 짚었던 포르투갈이 보였다.
웃음이 났다. 혼자서 낯선 부엌에서 커피를 끓였다. 두 잔.
준혁이 눈을 떴다. 유라를 보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지현에게 했던 것처럼.
"커피 있어요?"
"끓였어요."
잔을 건넸다. 준혁이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
유라는 그 말이 가슴에 내려앉는 걸 느꼈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왜였을까?!
유라는 SNS에 사진을 자주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올렸다. 준혁과 간 카페였다. 창가 자리, 커피 두 잔, 빛이 좋았다. 문구는 없었다. 그냥 사진만.
좋아요가 몇 개 달렸다. 친구들 것이었다.
그중에 혜진이 있었다.
혜진은 사진을 보다가 멈췄다. 커피 두 잔. 창가. 뭔가 익숙한 구도였다. 그냥 넘기려다가 — 배경이 눈에 걸렸다. 카페 벽에 붙은 포스터. 작고 흐릿하게 찍혔지만, 혜진은 알아봤다. 자기가 가본 곳이었다.
메시지를 보냈다.
— 유라야, 이 카페 어디야?
유라가 답했다.
— 홍대 쪽. 왜, 알아?
— 나도 가봤는데. 누구랑 갔어?
잠깐 뜸이 있었다.
— 그냥 아는 사람.
혜진은 그 "그냥"을 읽었다. 그냥이 그냥이 아닌 종류의 그냥이었다.
전화를 한 건 혜진이었다.
"유라야, 그 아는 사람 혹시 당근 모임에서 만났어?"
유라는 잠깐 멈췄다.
"어떻게 알았어?"
혜진이 잠시 침묵했다. 유라는 그 침묵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이름이 뭐야?"
"준혁이라고. 왜?"
이번엔 더 긴 침묵이었다.
"유라야."
"왜, 무슨 일이야?"
"나 그 사람 알아."
혜진은 천천히 말했다.
다 말하지는 않았다.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했다. 당근 모임에서 만났다는 것, 처음엔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 그런데 아니었다는 것.
유라는 전화기를 쥔 채 창밖을 봤다.
"얼마나 만났어?"
"두 달쯤."
"그러다가?"
"연락이 끊겼어. 갑자기."
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진도 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참 뒤에 유라가 말했다.
"나는 지금 —"
"알아."
"어떻게 알아?"
"목소리."
유라는 눈을 감았다. 포르투갈 지도가 떠올랐다. 손끝으로 짚었던 그 점이. 진짜로 가자고 했던 말이. 맛있다던 커피가.
"그 카페도 같이 갔어?"
혜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게 대답이었다.
전화를 끊고 유라는 한동안 앉아 있었다.
화가 나는지 슬픈지 몰랐다. 아니면 둘 다인지. 제일 먼저 든 생각이 — 커피 두 잔이었다. 맛있다던 그 한 마디가. 그게 이미 한 번 쓴 말이었다는 것이.
핸드폰을 들었다. 준혁과의 카카오톡 창을 열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어젯밤이었다.
— 잘 자요.
유라는 그 메시지를 오래 들여다봤다.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SNS를 열었다. 아까 올린 사진. 커피 두 잔, 창가, 빛이 좋은. 삭제 버튼을 눌렀다.
혜진의 좋아요도 함께 사라졌다.
수현은 원래 조용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모임에서도,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게 어색했다. 화가 나도 삼켰고, 슬퍼도 혼자 삭혔다. 그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준혁 때문에 처음으로 삭히는 데 실패했다.
수연이 준혁을 만난 건 다른 모임이었다.
동네 독서 모임. 책을 읽는 척 나가는 모임이었는데, 실제로 책 이야기는 처음 십 분뿐이었다. 준혁은 거기서도 여행 이야기를 했다. 오사카 새벽 골목, 바르셀로나의 빛. 수연은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 이야기 참 잘하네.
세 번째 모임에서 편의점 바나나우유를 받았다.
네 번째 모임이 끝나고 손을 잡았다.
다섯 번째 모임에는 준혁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바빠서 그러려니 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연락이 없었다. 수현이 먼저 했다.
— 요즘 바빠요?
답장은 하루 뒤에 왔다.
— 네 좀요 ㅎㅎ
수현은 그 ㅎㅎ를 오래 들여다봤다. ㅎㅎ가 뭔지 알았다.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 다음 모임엔 나와요?
이번엔 답장이 없었다.
사흘이 지났다. 일주일이 지났다. 수현은 매일 카카오톡 창을 열었다. 읽음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 그게 제일 나빴다. 읽었다는 것. 읽고 안 했다는 것.
그날 독서 모임에 수현은 책을 가져가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말이 나왔다. 막으려 했는데 막히지 않았다.
"저 좀 이상한 경험 했어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모임 사람들이 수현을 봤다. 수현은 시선이 모이는 걸 느꼈다. 멈춰야 했다. 그런데 멈춰지지 않았다.
"여기서 만난 건 아닌데요. 당근 모임에서 만난 사람이에요. 처음엔 진짜 좋은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여행 이야기 되게 잘하고, 질문도 잘하고, 들어주는 척도 잘하고."
누군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 사라졌어요. 연락이 끊겼어요. 읽고 안 하는 거 있죠. 그게 제일 나쁜 거잖아요. 읽었으면 뭐라도 해야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수연은 그걸 느꼈다. 민망했다. 그런데 계속 나왔다.
"근데 더 웃긴 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저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다른 모임에도 있었대요. 거기서도 똑같이 했대요. 여행 이야기 하고, 바나나우유 사주고, 집에 데려다주고."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그러니까 저는 — 특별한 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그냥 공식이었던 거예요. 처음부터."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이었다.
아무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맞은편에 앉은 미래가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수현이 말했다.
준혁이라고.
미래가 핸드폰을 꺼냈다. 뭔가를 검색하는 것 같았다. 잠깐 뒤에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근 모임 92년생이요?"
수연이 굳었다.
"어떻게 알아요?"
미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게 대답이었다.
테이블 위에 책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오늘의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아무도 펼치지 않았다.
다시 봄이 됐다.
그날 밤 준혁의 핸드폰에 알림이 쏟아졌다.
당근 모임 1 — 탈퇴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근 모임 2 — 탈퇴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근 모임 2 — 탈퇴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근 모임 1 — 탈퇴한 사람이 있습니다.
준혁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갤러리를 열었다. 다낭의 수영장. 오사카의 골목.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표정은 여전히 같았다. 살짝 올린 턱, 눈은 반쯤 게슴츠레, 입꼬리는 한쪽만.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을 뿐이야. 그래서 같은 방법을 계속 썼던 것이고. 그게 나쁜 줄 알면서도.”
1년이 지난 재훈의 모임에는 이제 남자 셋과 여자 둘이 남아 있었다. 준혁도 결국 탈퇴했다.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어느 토요일 오후, 남은 다섯 명이 동네 국밥집에 앉았다. 아무도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해외여행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국밥을 먹었다. 가끔 웃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재훈은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맛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불쑥 말했다.
"근데 우리, 뭐 한 거야 결국.
웃음기가 섞인 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들 국밥 그릇을 내려다봤다. 창밖으로 봄볕이 들어왔다. 날이 좋았다. 그게 더 묘하게 허탈했다.
한참 뒤에 재훈이 말했다.
"국밥이나 먹읍시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딘가에서 준혁은 또 다른 당근 모임을 검색하고 있었다.
갤러리엔 아직 사진이 4,200장이었다.
어쩌면 준혁은 4,200장의 창밖 풍경을 가졌지만, 단 한 번도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지 못했다. 사람을 보는 눈은 결국 나를 보는 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다음 모임에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