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 판의 시간

by 안개꽃 눈송이

논에 벼 이삭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마치 세상의 눈치를 살피듯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들판은 고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갈 것이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이삭들은 가볍게 춤을 추었고, 그 부드러운 흔들림 속에서 계절은 한 뼘 더 익어갔다.

바람이 불던 날,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익은 벼 이삭들이 서로를 스치며 내는 소리—솨아, 솨아. 그건 단순한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귀를 기울이면, 마치 벼들이 서로 인사하는 듯했다. “잘 익었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해.” 들판은 말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잘 익은 벼들은 그렇게 말을 한다.

아마도 벼들은 기억할 것이다. 씨앗을 뿌리던 봄의 손길, 장마를 견뎌낸 여름의 인내, 그리고 햇살을 품으며 기다리는 가을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다. 이삭 하나하나는 그 모든 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간의 결정체다.


대학 시절 공부도 지겹고 휴학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여주에 우연히 내려간 적이 있다. 아마도 뭔가 답답해서였을 것이다. 남들은 농활도 한다는데 너는 집에서 뭐 하냐는 핀잔을 들어서였던 것 같다. 친구들과 농활을 떠나는 대신, 나는 외삼촌의 벼베기를 도왔다. 갑작스레 시작된 일이었고,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낫을 쥐게 되었다. 허리를 숙이고 벼를 베는 동작은 처음엔 어색했고, 곧이어 고통스러웠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로 베야 하는 일은 논둑 옆에 있는 벼였다. 이 놈들은 특히 베기가 어려웠다. 기계로 벼를 베기에도 쉽지 않은 곳이기에 사람이 둑을 따라 자란 일일이 벼를 베어야 했다. 낫이 닿기엔 각도가 어긋나 있었고, 뿌리는 더 단단히 박혀 있었다. 허리를 더 숙이고, 손목에 힘을 더 실어야 했다. 그 몇 포기를 베는 데 걸린 시간이, 들판 가운데를 훑던 시간보다 길었다. 하지만 그 벼들도 한 해를 묵묵히 견뎌낸 존재들이었다. 바람에 덜 흔들리고, 물길에 덜 젖으며, 조용히 자라난 벼. 그 벼를 베는 순간, 나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등을 쓰다듬듯, 천천히 낫을 움직였다.

삼촌이 베는 양은 남달랐다. 혹시 낫이 달라서일까? 바꿔 보자 했더니, 쓰는 낫이 다르다며 안된다고 했다. 삼촌은 왼손잡이였다. 왼낫과 오른 낫의 미묘한 차이—벼를 베는 순간 깨달았다. 아! 오른 낫을 써야 하는구나 하지만 그 서툰 손놀림 속에서도, 나는 시간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수확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해의 마음이, 땀과 바람과 햇살을 지나 달콤한 열매로 맺히는 순간이었다. 벼 이삭을 손에 쥐고 바라보는 그 찰나,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그 결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자연은 그렇게 말없이 가르친다. 기다림의 미덕, 흐름의 지혜, 그리고 익어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들판을 걷다 보면, 마음도 함께 익어간다.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들판은 여전히 말없이 서 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공허하지 않다. 바람이 이삭을 흔들고, 햇살이 논을 비추는 그 순간, 나는 삶의 리듬을 느낀다. 그리고 그 리듬 속에서, 나 또한 조금씩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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