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와 행주, 그리고 연꽃

불완전한 존재가 더 나은 세계를 향할 수 있을까

by 안개꽃 눈송이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서 늘 생각해 본다. 주방 한구석에 있는 걸레와 행주다. 둘 다 천 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 쓰임새는 하늘과 땅 차이다. 행주는 반짝이는 접시를 닦고, 유리잔의 물때를 문지르며 주방의 빛나는 무대를 지킨다. 걸레는 그와 달리 바닥의 먼지, 끈적이는 기름때, 사람의 발자국이 남긴 흔적을 묵묵히 훔친다. 우리는 행주를 깨끗하다 여기고, 걸레를 더럽다고 여긴다. 정말 그럴까? 이 단순한 물음은 나를 인간의 본질과 불완전함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끌었다.

걸레는 더러움을 위해 태어났다. 그것은 진흙이 묻은 바닥을 닦고, 더러운 구석을 정화하며 세상의 때를 감당한다. 더러움에 물든다고 비난받지만, 사실 걸레는 더러움을 끌어안음으로써 세상을 깨끗하게 만든다. 이는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선택과 책임으로 정의하는 모습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 속에서 스스로를 만들어간다고 했다. 걸레는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결함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결함을 통해 세상을 정화하는 존재. 나는 여기서 겸허한 용기를 본다.

반면, 행주는 깨끗함의 상징이다. 빛나는 주방에서, 더러움과 거리를 두며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행주는 때로 너무 깨끗함에 집착한 나머지, 더러움에 닿는 순간 버려진다. 마치 노회찬 의원과 같다. 너무나 깨끗함을 사람들은 요구한다. 그래서인지 행주는 아름답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없다. 이는 플라톤의 현상과 실재의 괴리를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행주가, 실은 한계와 취약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외형적 완벽함에 속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선자를 행주와 같다고 여기며 비난한다. 자신의 결함을 감추고, 깨끗한 척하며 세상을 속이려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더러움을 외면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가 어떤 정치인에게 표를 찍어 줄 때, 그가 정말로 완벽해야만 투표하는 것일까? 그의 손이 더럽지 않아야만 할까? 아니, 나는 믿는다. 불완전한 존재, 걸레처럼 더러움을 감당해 본 사람, 행주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진흙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나려는 사람에게 우리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연꽃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상징이다. 진흙 속, 혼탁한 물에서도 그 뿌리는 단단히 땅을 잡고, 꽃잎은 햇빛을 향해 고결하게 피어난다. 장자의 도가철학은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연꽃은 그런 존재다. 하이데거의 “세계 속 존재”처럼, 진흙이라는 세속의 조건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고결함을 유지한다. 연꽃은 완벽하지 않다. 그 뿌리는 여전히 진흙에 잠겨 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 애쓴다. 행주처럼 빛나는 이들, 결점 없는 영웅을 꿈꾼다. 하지만 세상은 행주나 걸레로 바뀌지 않는다. 세상은 걸레처럼 더러움을 감당하고, 연꽃처럼 진흙 속에서 피어나려는 이들에 의해 바뀐다. 그들은 실수하고, 흔들리고, 때로는 넘어진다. 하지만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을 닦아내며, 더 나은 세계를 꿈꾼다. 그들의 뿌리는 이미 연꽃의 뿌리다.

삶은 진흙이다. 우리는 모두 그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하지만 그 진흙 속에서도 누군가는 피어나려 한다. 걸레의 겸허함을 품고, 행주의 위선을 경계하며, 연꽃의 고결함을 꿈꾸는 사람. 그들에게 우리는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불완전한 존재라도, 더 나은 세계를 향한다면, 그들은 이미 연꽃의 씨앗을 품고 있다. 우리도 그 씨앗을 심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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