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글: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내가 처음 문단에 나올 때(1970년)만 해도 사십 세에 데뷔하는 일은 좀 희귀했었나 보다. 들고 나온 작품보다는 그 나이에 어떻게... 라는 호기심으로 더러 화제가 되었었다.
인생과업이라는 게 있다. 사회에 속한 인간이 인생의 각 시기별로 이루어야 하는 일이다. 갓난 아기들이 때가 되면 몸을 뒤집어야 하고, 혼자 일어날 수 있어야 하고,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계속 이어져, 때가 되면 학교에 가야 하고, 졸업을 해야 하고, 취직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하고, 2세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 인생과업의 과정 중 한 군데에서 멈춰 있다. 제법 긴 시간동안.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결혼 적령기를 지났다. 그 결혼 적령기라는 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건만 우리는 모두 그 시기가 언제인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기를 그냥 훌쩍, 넘겨버렸다.
사회에 속한 인간이기에 이런 날 사회가, 정확히는 나를 둘러싼 주위가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다들 왜 사람을 만나지 않느냐 이 사람을 만나봐라 저 사람을 만나봐라 야단인 시기가 있었다. 특히 그 결혼 적령기의 어떤 분수령으로 여겨지는 30세 전후에 극심했다, 그 시기를 심드렁하게 보내자 다음으로는 네가 이래서 사람을 못 만난다 이렇게 고쳐봐라 저렇게 고쳐봐라 야단이었다. 그 시기마저 심드렁하게 보내자 다음엔 뒷말이었다. 돈 벌고 살면 뭐해, 남자 하나 못 만나는데. 저 나이까지 혼자 있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인 거지.
아, 그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인생과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내가 어떤 신념을 갖고 이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지금의 내가 좋아서,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 해야 하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그것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일 예정이라서. 그냥 지금 내가 독립적인 한 개체로 해야 할 것들이 충분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충분해서.
그래서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후회할 거라고 이미 단정하고 있다. 사회가 그런 인생과업을 만든 건 다 이유가 있다고, 너보다 더 잘난 사람들도 다들 그 인생과업을 거친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아마 그럴 것이다. 세상에 '그냥 만들어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러고 싶다. '바로, 여기, 지금'을 즐기고,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미래에 후회할 때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길. 난 '바로, 그 때'를 정말 잘 지냈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세상에 글쟁이로 선을 보이게 되었을 때의 감상도 꿈을 이루었다든가, 노력한 결실을 거두었다든가 하는 보람보다는 마침내 쓰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안도나 체념에 가까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