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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감 Jul 19. 2022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느리게 간다

[글쓰는 오늘] 판교책방 글쓰기 모임 두 번째 날

오늘의 글: <없던 오늘>

레트로 위크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오직 첨단, 최신, 효용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느끼는 날이면... 그리고 그 첨단의 끝이 자꾸 나를 찔러 부쩍 피곤하게 느껴질 때면... 의도적으로 일주일 정도를 과거와 함께 지내본다.

연필깎이를 돌려 매끈하게 깎인 연필을 빼낸다. 막 깎인 나무의 냄새가 약하게 난다. 종이에 연필을 눌러 글씨를 쓰면 어김없이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나도, 손날에는 흑연이 묻는다.

컨버터에 잉크를 넣는다. 손가락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잉크가 커다란 점처럼 번져 있다. 휴지로 손가락을 닫고, 컨버터를 만년필에 끼운다. 반투명한 피드를 따라 잉크가 흘러내려가는 게 보인다. 잠시 그대로 세워놓는다. 그 동안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냥 책 몇 줄을 읽는다. 못 참고 만년필을 집어든다.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 다시 세워놓고 또 책 몇 줄을 읽는다. 금방 다시 만년필을 집어든다. 이제 글씨가 써진다. 매끈한 종이 위에 잉크가 둥그스름하게 묻었다가 마른다.

전자책 단말기를 가지고 있지만 오늘도 서점에 가서 책을 두 권이나 사 버렸다. 책장을 펼치고, 책갈피를 미리 준비해 놓는다.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집중이 안 될 때면 손가락으로 문질러가며 글자를 따라간다. 약간 거친 종이결이 손가락 끝을 통해 느껴진다. 그 감촉이 제법 좋아서 계속 손가락으로 문질러가면서 읽는다.

노트를 편다. 휴대전화에는 일기를 쓰기 위한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그렇지만 펜을 들어 오늘 날짜를 적고, 스티커로 요일을 떼어 붙인다. 오늘 한 일들, 있었던 일들을 짤막하게 적는다. 내일 할 일이 생각난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은 간단하게 적어 작아 보이게 한다. 오늘의 기분을 표시한다. 며칠 전 다 읽은 책 제목과 저자를 적는다. 오늘 처음 들은 노래의 제목을 적는다.


많은 사람들이 문구점에서 일기장을 산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때면 다음 해를 위한 다이어리가 쏟아져 나온다. 한정판 만년필을 사모으기 위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새로 온 만년필을 융천으로 닦으며 아끼고 글씨를 쓴다. 연필을 사서 연필깎이나 칼로 깎은 다음 코에 대고 나무 냄새를 맡는다. 어떤 사람들은 LP판을 턴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순간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할 때 찰칵, 하는 소리를 좋아한다. 휴대전화의 카메라 화질이 엄청나게 좋아졌음에도 필름 카메라로 찰칵,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고 굳이 현상되는 시간을 기다린다. 디지털 카메라처럼 찍은 사진을 미리 확인할 수 없어, 필름을 현상하고 나면 '내가 이런 사진을 찍었나' 하는 것들이 분명 나오지만 그 우연마저 즐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고,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살아남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책하듯 천천히 걷고 싶다. 누군가는 고속도로에서 최고속도로 달리며 앞서나가고 싶겠지만, 누군가는 천천히 걸으면서 움직이는 구름도 보고, 느리게 스쳐가는 바람도 느끼고, 새소리도 듣고 싶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속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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