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 원효대사 해골물 체험에 대하여
최근 게임 하나를 엔딩까지 보고 나서 다음 게임을 무얼 하지 하는 고민 기간이었다.
방대하지만 손이 가는 게임은 없는 풍요 속의 빈곤 같은 라이브러리만 들락날락하며 게임은 하지 않고
유튜브나 간간히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득 이전에 세일한다고 사두었던 FC24가 떠올랐다. 사실 피파를 그렇게 많이 플레이했거나, 좋아했거나 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소싯적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플레이했던 그 게임, 위닝 일레븐은 나도 역시 꽤나 오랜 시간 플레이 했었다. 시리즈가 몇 번 바뀌어 망조가 들고, 이제 축구 게임은 위닝 일레븐에서 피파로 왕좌가 넘어간다고 해도 꾸준히 위닝 일레븐(이제는 PES지만)을 플레이했었지만 비슷하겠지라는 생각에, 그리고 피파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니까 구매했던 FC24였다.
사실 FC24를 사두고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구매하자마자 몇 판 플레이 해보았는데...
어렵다... 너무 어렵다... 도저히 나는 한골도 넣지 못하겠는데 상대방(CPU)은 전반에만 나에게 두 골, 세 골, 어떨 때는 네 골을 몰아넣으며 나를 농락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원래도 나는 그리 축구 게임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친구들 중 못하는 친구랑 하면 막상막하, 조금 잘한다는 친구랑 하면 100% 지는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CPU도 이기지 못했었던가... 자괴감이 들어서 몇 판 해보고 끄고 그 이후로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떠오른 김에 다시 한번 해볼까...?
게임을 켜고 두 판을 플레이했다. 6:0 패배 한 판, 7:0 패배 한 판...
아 어렵다 너무 어렵다... 어떻게 이렇게 어렵게 만들 수 있지? 게임을 잠시 끄고 유튜브에 들어가서
FC24 팁 영상을 몇 개 보며 조작법을 배웠다. 절치부심하고 다시 도전했지만 마찬가지로 전반에만 3골을
헌납하고 게임을 끄려는 찰나, 불현듯 머리에 스친 생각이 있어 게임을 끄지 않고 메인 메뉴로 나갔다.
옵션창을 열심히 뒤져보니 아뿔싸! 난이도가 레전더리 모드로 설정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난이도를 변경해 보니 레전더리 모드가 가장 높은 난이도였던 것이다. 아니 이러니 내가 이기질 못했지...
난 또 안 그래도 없는 내 실력이 더 없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가장 쉬운 초보 모드로 변경하고 게임을 플레이하자, 그간 철벽 수비를 보여주던 CPU는 갑자기 내게
공을 헌납하고, 골문으로 쇄도하는 나의 홀란드를 전혀 제지하지 않는다. 아니 이게 뭐람...
진작 난이도를 찾았으면 스트레스받지 않고 재밌게 게임을 했을 텐데.
문득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두운 밤 목이 말라 옆에 있는 바가지에 있는 시원한 물을 마시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보니 바가지인 줄 알았던 것은 해골바가지였다는 이야기.
내 FC24 플레이 경험이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와 무슨 연관이 있냐 싶겠지만,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리버스 원효대사 해골물"이다.
나는 내 손에 든 게 해골물인 줄 알고 어떻게든 마셔보려 갖은 애를 썼지만, 사실 내가 든 해골은
사람 해골이 아니라 해골 모양 플라스틱 바가지였을 뿐이었던 것이지. 나는 해골인지 플라스틱인지
확인해 볼 생각은 안 하고 해골이라고 단정 짓고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마셔보려 했던 것이다.
이전에 너무 어려운 플레이를 경험했을 때 이게 해골이 맞나, 플라스틱은 아니었나 하고 확인해 보았다면.
그랬다면 진작에 기분 좋게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었겠지.
그렇게 초보 CPU와의 대전은 전반에만 6골을 넣고 시시해져 중간에 꺼버렸다.
다음엔 적당한 난이도를 골라서 피 튀기는 접전을 경험해 보고 싶다.
그리고 다음에 어떤 너무 어려운 위기던 난감한 상황 같은 것이 찾아온다면,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겠다.
이거 혹시 "리버스 원효대사 해골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