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산책(散策) :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닐음
해 지기 전 저녁, 공원 산책을 나왔다.
배드민턴 치는 가족들, 아이의 걸음마를 지켜보는 남자, 개를 산책시키는 여자, 돗자리를 깔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손잡고 운동장을 도는 노부부……. 일상적이고 건전한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트랙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나를 제치기 시작했다. 오른 쪽 뒤에서 여자 하나, 왼쪽 뒤에서 달리는 남자 하나, 다시 오른쪽 뒤에서 이어폰을 낀 할아버지... 그 수는 순식간에 늘어나, 나만 두고 앞서나가는 것 같았다. 점차 내 주위의 색이 달라져갔고, 그들은 모두 영롱한 비눗방울이 되어 내게서 떠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음에도 그렇게 느껴졌다.
문득 하늘을 보자, 색감이 한 톤 어두워져 있었다. 잔디의 색이 강해졌고, 사람들은 더 선명해졌다.
위를 보며 걸으니, 대형 병원이 보였다. 울타리 겸 커다란 나무로 경계가 되어있을 뿐으로, 무척 가까운 거리였다. 그 병원은 최근 심각한 유행병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이 되도록 주위에도 가지 않고, 아파도 일부러 다른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그 바로 앞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사람들은 건강해지기 위해 걷고 있었다. 아이들과 개도 많았다. 재밌게 느껴졌다.
걷기 시작한 지 사십 분 정도 지났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최근에는 무얼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없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다만 아직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걷기로 했다.
배드민턴의 숲을 지나, 운동 기구가 있는 곳으로 왔다. 구름사다리는 자신 있었다. …사실 거짓말이다. 오 년 전에는 자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우선 매달려 보았다. 손에 땀이 나서 미끄러웠다. 내려와 닦고, 다시 매달렸다. 손바닥의 살이 집히며 아팠다. 하나 하나 건너가자, 잊었던 감각이 살아났다. 나는 쉽게, 그러나 예전보다는 무겁게 착지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곳을 나섰다. 한 번 건넌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미련은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배고픔이 약간 가셨다. 하지만 속이 가벼웠기 때문에, 물을 조금 마시면 금방 입맛이 살아날 것이다.
손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처음 구름사다리를 연습했을 때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눈이 내려 철봉이 미끄러웠고, 심장이 아플 만큼 차가웠다. 나는 건너가야만 했고, 울면서도 건너갔고,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났다. 그 때 철봉엔 내가 짚고 간 자리마다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눈이 내렸으므로,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타인의 절박함은 쉽게 지워지는 것이므로.
아까부터 큰 소리로 안내방송이 울렸다. 미아를 데리고 있으며, 보호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여섯 살 지민이는 지금 홀로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울기도 했을 테고, 아저씨가 준 사탕을 먹지 않고 손에 꼭 쥐고만 있을 것이다. 나는 지민이를 뒤로 하고 공원을 나섰다.
주위는 빠르게 어둑해져왔다. 누군가 하늘에서 검은 보자기를 씌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슬슬 허리가 아파오고, 손을 씻고 싶어졌다.
걷는 내 발목 주위로 작은 나방이 날아다녔다. 그것이 발에 자꾸 채여 거슬렸다. 작게 헛발을 치자, 나방은 빠르게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려봤지만, 그다지 당기는 음식이 없었다. 사실은 집에 남은 비지찌개를 먹어야 하지만, 새로운 게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싶었다. 무언가 딱 하나만 간절히 바라는 그 느낌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걸으면서 고기 굽는 냄새, 튀김 냄새, 달콤한 냄새까지 거쳐 왔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발을 멈추게 하지는 못 했다. 나는 그대로 집에 도착했다.
신발을 벗으며 건더기가 거의 없는 비지찌개에 밥을 말아 비비는 상상을 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사실, 난 비지찌개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