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조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 Dec 11. 2017

을과 을 사이

  길지 않은 시간 사이에, 나는 하나의 업계에서 두 가지 위치에 서보게 되었다.


  한 번은 '슈퍼 을'이었고, 다른 한 번은 '세미 갑'이었다. 사실 '갑'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위치였지만, 을의 을, 아니 을의 을의 을이었다가 그냥 을 정도는 마치 갑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이 내게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온몸으로 겪게 되었다. 그냥 을일 때, 나는 좀 우쭐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은 허울좋은 을일 뿐,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 애매한 간극을, 타인에겐 설명하기 어려웠다. 물론 나에겐 좋은 일이었고, 기회였고, 경력이 되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슈퍼 을에서 벗어나 그냥 을이던 때에, 투자사 및 타 회사 관계자들까지 오는 전체회식이 있었다. 나는 타 관계자분과 팀장님, 부서이동하신 사원님과 같은 테이블에서 고기를 먹었다. 술도 얼추 들어가고 나서, 타 관계자분이 나에게 야망이 있냐고 물었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팀장님이 "야망이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라고 질책하듯 말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 했던 말이었다. 팀장님은 나를 비난한 건 아니었다. 언제나 내 페이에 대해 미안해했고, 나에게 과분하게 잘해주셨다. 팀장님은 내가 더 욕심을 부리길 바라는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야망이 없어보였구나, 라고 그 순간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을로서 치이고, 을에게 치이고, 을이 되지 못함에 치였던 나에게 야망은, 너무나 뜬구름 잡는 단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야망이 있냐고 물어봐준 그 분에게 나는 혼자 감사를 드렸다. 내가 야망을 가지지 않음에 질책한 팀장님께도, 나는 감사를 드렸다. 나는 야망을 가져도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야망을 가지기에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봐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나는 계속 을 혹은 을의 을로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야망을 꿈꾸기 시작해도,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당분간은.


  그러나 언젠가는. 을로서도 괜찮은 위치, 괜찮은 경력 그리고 꽤 괜찮은 자신감이 생긴다면. 그때는 감히, 야망이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회식은, 첫차가 다닐 때 쯤 끝이 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거짓없는 가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