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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열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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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 Nov 16. 2019

길목의 전당포

  눈을 뜨는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순식간에 알 수 없는 심연 아래로 꺼진 의식이, 온 우주를 거쳐 몸으로 되돌아오는 긴 시간의 찰나를. 잠든 내내 꾸는 것 같던 꿈이 사실은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던 것처럼, 꿈을 깨는 일 역시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온은 눈을 떴다. 온은 알 수 없는 길 한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스스로 걸어왔다고 하기 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놓여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온은 오래도록 걸은 것 같은 피곤함을 느꼈다. 시야가 흐릿했고,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이 미처 다 도착하기 전에 눈을 뜬 것 같았다. 온은 시야가 또렷해질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었다. 시야와 함께 정신이 제대로 돌 쯤, 온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온은 도로 눈을 감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무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온 몸을 내리누르는 피곤함 때문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쉴 수 있다면, 이대로 계속 길 위에 버려진 채여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온은, 차츰 땅을 통해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둑한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연푸른 옷을 입은, 청초해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깊은 생각을 하는 듯, 걷는 것 외엔 모든 행동이 배제되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온은 말없이 일어나 앉아, 남자를 관찰하듯 살펴보았다. 이윽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조금 걸음을 서둘러 온에게 다가왔다.

  "당신은 무얼 가져왔어요?"

  그리고는 대뜸 온에게 물어왔다. 

  "…무얼요?"

  "대가요."

  "대가?"

  온이 되묻자, 남자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온은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자욱한 안개 때문에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온이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쪽에 강이 있어요."

  남자의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온은 저곳이 곧 자신이 가야하는 곳임을 알았다. 

  "그래서, 당신은 뭘 가져왔어요?"

  남자는 아예 온 옆에 자리잡고 앉으며 물었다. 온은 괜히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돈 말고요."

  남자는 짐짓 새침하게 말했다.

  "요새 누가 노잣돈을 가져 온다고."

  돈을 꺼내려던 건 아니었지만, 온은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그래요, 뭐. 대부분 자신이 뭘 가져왔는지 처음엔 잘 모르더라고요."

  남자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당신의 대가를 알려주는 곳이 있으니까."

  남자는 다시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기가 어딘데요?"

  "당신이 대가를 치를 곳."

  남자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온은 얼결에 일어나 남자의 뒤를 따랐다. 온은 좀 멍청해진 기분으로 물었다.

  "저, 그러니까. 이곳을 안내해주시는 분인가요?"

  그러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가 그렇게 친절한 곳인 줄 알아요? 당신은 길눈이 어두운 것 같으니까. 아까 강도 발견 못 했잖아요. 그리고."

  남자는 잠시 말을 망설였다.

  "가서 부탁할 것도 있고."

  온은 알았다는 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목적이 생겼다는 느낌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온은 남자를 뒤따라 걸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짙은 안개가 가득해서 멀리 보이지 않았다. 온은 방향이 가늠되지 않았지만, 남자는 길을 잘 아는 듯 걷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문득 습한 냄새가 났다. 온은 깊게 숨을 들이쉬어 보았다. 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숨을 쉰 건지, 쉬었다고 생각한 건지 사실은 구분할 수 없었다. 온은 여기 저기 몸을 움직여보다가, 손가락 끝들을 엄지손톱으로 눌러보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은 단단했다. 살아있던 그대로라고, 온은 생각했다. 온은 일정한 속도로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 길은 강을 건너는 길이라 했다. 그럼 반대로 간다면, 혹시나 살아나게 될까. 온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온의 발이 멈추었다. 저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온의 망설임을 눈치 챘는지, 남자가 온을 돌아보았다. 남자는 온의 생각을 눈치챈 것 같았다.

  "아직 삶에 미련 있어요?"

  온은 흘끗 뒤쪽을 곁눈질했지만, 다시 살고 싶다는 커다란 욕망같은 건 없었다. 온이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그럼 그냥 날 따라오는 게 좋아요. 아니면 영 헤매야 할 걸요."

  남자는 설핏 웃었다.

  "나처럼."

  남자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온은 달리는 차에 받혔고,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혹시나 다시 살아난대도, 몸이 없다면 얼마나 곤란할까. 온은 뒷목을 문질렀다. 이미 죽었는데,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까, 싶었다. 온은 아마 영영 가지 못 할 뒤쪽을 바라보다, 남자를 뒤따라갔다. 

  얼마동안 걸으니, 시야에 검은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기에 가는 건가요?"

  온이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검은 형체는 서서히 가까워졌다. 멀리서 봤을 땐 꽤 거대해 보였으나, 막상 눈앞에 도달해 보니 생각보다 작은 건물이었다. 건물이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나무판자로 대충 박아 형태만 겨우 유지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가 어딘데요?"

  온의 물음에,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전당포."

  온은 문득 천국행 티켓을 사야한다던, 어릴 적 교회 어린이 주일학교에서의 보물찾기가 생각이 났다. 아이들은 교회 뒷산을 걸으며 각 코스에서 올바른 보물을, 이를테면 성경 등을 선택하면 노란 표를, 만화책 같은 나쁜 보물을 선택하면 빨간 표를 받았다. 일부 영악한 아이들은 노란 표가 정답임을 알고, 자신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노란 표에 상응하는 것들만 선택했다. 온 역시 의기양양하게 노란색의 면죄부만을 받아 결승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보물찾기를 끝내고 아이들을 모아놓은 교사는 의외의 말을 했다.

  "천국은 노란 표로도, 빨간 표로도 갈 수 없어요."

  당시 온에게는 그 말이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 때 교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행사를 귀결지었지만, 온에게는 배신감만이 남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보니, 온은 또다시 모르게 되었다. 나의 대가는, 노란 표가 더 많을까 빨간 표가 더 많을까. 지금이라도 전당포 주인에게 기도를 해야 할까 온은 잠시 고민했다.

  "아까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면, 그 분에게. …나는 언제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봐줘요."

  "그 분?"

  "들어가면 알아요."

  "부탁은 그것뿐인가요?"

  "나에겐 중요한 일이에요."

  "당신은 못 들어가나요?"

  "대가가 없어서."

  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두드려요."

  남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온은 그의 말대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은 밤바다처럼 어두웠다.

  "그럼, 명운(冥運)을 빌어요."

  온은 안으로 한 발 디딛었다. 

  온이 안에 들어서고 다시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까지, 그 짧은 순간에 온은 완전한 어둠을 맛보았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영롱함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모든 것과 일체(一體)가 되는 감각이었다. 더 이상 온 자신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감각. 하지만 온이 이 감각을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문이 완전히 닫혔고, 동시에 온은 어둠에게서 내쳐졌다. 순식간에 건물 안이 밝아진 탓이었다. 온은 잠시 서서, 순간적으로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기억해보려 했다. 그 때, 안쪽의 방문이 저절로 열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야."

  온은 방 쪽을 바라보았다. 저곳으로 가면, 아마 그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온은 조금 열린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방 안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고, 가운데에 놓인 책상에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여자는 틀어 올린 머리에 큰 비녀를 꽂았고, 한복처럼 보이는 기묘한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에게선 정갈한 위엄이 느껴졌다.

  "와서 앉아."

  온은 여자의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는 책상 한쪽에 쌓인 두루마리의 산을 뒤지다가, 하나를 빼내었다. 그리고 빼낸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 뒤 여자는 한 팔로 어지러운 책상을 슥 밀어 얼마간의 공간을 만든 뒤, 그 두루마리를 한 자쯤 되게 펼쳐놓았다. 온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두루마리도 살짝 곁눈질 해 보았으나, 처음보는 형태의 글자들이 적혀 있어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가만히 온에게 눈을 마주쳐왔다. 순간 온은 몸이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의 시선이 온에게서 그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대의 손으로도 끊을 수 있는 것을, 끊지 못 하고 그대로 가지고 왔구나."

  온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건 죄 같은 건가요?"

  온은 계속 아무것도 없는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그건 나의 소관이 아니야. 아직 보이지 않는 건가."

  온은 몸을 바로했다. 여자는 서랍을 열어 곰방대를 꺼내들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어?"

  "전당포라고."

  "밖에 있는 그 아이가 그랬지?"

  여자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의 반응에, 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러니까, 대가를."

  "강을 건너기 위한 대가를 알기 위해 이곳에 왔다."

  "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여자는 곰방대를 털어내고, 새 연초를 눌러 담았다. 그러더니 발밑에서 아담한 유리 새장같이 생긴 걸 꺼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유리 새장 안에는 작은 불빛 둘이 은은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자가 곰방대 끝을 새장 안으로 밀어 넣자 두 불빛들이 서로 부딪치며 연초 주위를 맴돌았고, 이윽고 연초에 불이 붙었다.

  "다시 대가를 찾으러 올 수 없을 테니까."

  여자는 만족스럽게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온은 다시 평화롭게 노니는 두 불빛을 구경하다가, 이유를 묻는 눈빛으로 여자를 봤다.

  "영원히 잊어버리거나. 혹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거든."

  "그럼 저 밖에 있는 그 사람도, 그런 경우 인가요?"

  여자가 연기를 내뱉었다. 눈에 보일 만큼 짙은 연기였다.

  "그대의 이야기보다 그 아이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

  온은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계속해서 담배를 태웠다. 온은 그 연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뭉쳐진다는 것을 알았다. 연기들이 한데 모여 두루마리 위에 구름처럼 둥실 떠 있었다.

  "그대의 것을 확인해 보자고. 그대가 무얼 여기가지 가져왔는지를 확인해 봐."

  여자가 손짓을 하자, 뭉쳐있던 연기구름이 온을 향해 날아왔다. 온이 놀라 몸을 움직였지만, 구름이 더 빨랐다. 구름은 온의 눈을 가렸고, 이윽고 온의 전신을 휘감았다.

  온은 다시 어둠에 장악되었다.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아주 어두운 흑발로, 단정하게 생긴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갈색으로 염색한지 오래 되어 보이는, 얼룩덜룩한 머리를 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 둘을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고 있는 온이 있었다. 

  온은 문득 정신이 들어 작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조금씩 기억이 났다. 이곳은 저 검은머리 남자, 피아니스트의 집이었다. 갈색머리는 온의 회사 동료로, 잡지사 에디터였고, 온 자신은 그 잡지사의 포토그래퍼였다. 온은 지금 저 피아니스트의 인터뷰를 찍는 중이었다.

  피아니스트의 사진을 찍으며 싱숭생숭했던 기분 역시 떠올렸다. 피아니스트는 잘생긴 외모와 연예인 지인을 통한 TV출연으로 뜨겁게 유명해졌고, 회사는 트렌드에 발맞추어 이 피아니스트를 표지모델로 내세우기로 했다.  

  온 역시 그의 연주 영상을 본 적 있었다. 제대로 된 무대는 아니었고,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섭외되어 무겁지 않은 곡을 쳤는데, 그가 천재적이진 않더라도 무척 즐거워보였다고 생각했다. 그가 연주한 곡은 무난했고, 그의 실력 역시 무난했다. 온은 운 좋은 사람이라고, 그래서 부럽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두 남자의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온은 문득 남자의 연습실에 시선을 두었다. 연습실은 문이 달리지 않은 방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검정색 피아노가 커다란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온은 카메라를 들어 렌즈를 통해 피아노를 들여다보았다.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이는 검정색 피아노였다. 온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 때, 렌즈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피아노가 마음에 드세요?"

  찰칵. 난데없이 나타난 얼굴과 목소리에, 온은 놀라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아, 방금 거 너무 가까워서 못 나왔을 거 같아. 그건 싣지 말아주세요."

  피아니스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온을 보고 있었다. 온은 주위를 돌아보니, 갈색머리 동료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온은 할 수 없이 사무적인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잘 나온 것만 실을테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요?"

  "네?"

  "앞의 질문은 대답 안 해주셨어요."

  피아노가 마음에 드세요? 그냥 네, 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입이 생각만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온은 그냥 그에게 웃어보였다.

  "인터뷰 끝나고, 혹시. …시간 되세요? 맥주 한 잔 했으면 좋겠어요."

  온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마침 담배를 끄는 동료를 발견했다.

  "에디터님한테 시간 되는지 물어볼게요."

  "아뇨, 그게 아니라, 둘만."

  피아니스트는 다급하게 말 했지만, 에디터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피아니스트는 다시 인터뷰용 미소를 짓고 소파로 돌아가 자세를 잡았다. 온도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피아니스트는 잠시 전화를 받으러 다른 방으로 갔다. 온은 오늘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발레에 소질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뜬금없이 들려온 말에, 온은 고개를 들었다.

  "발레?"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거죠. 우리 엄마가 나 어렸을 때 태권도가 아니라 발레를 시켰다면, 나도 여기서 인터뷰를 받고 있지 않았을까요?"

  온은 아마 그랬어도 지금과 별 다를 것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발레에 관심 있었어?"

  "사실 발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예를 든 거죠. 선배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온은 무심코 연습실의 까만 피아노를 쳐다봤다.

  "글쎄."

  "저 사람은 일반고 나왔는데도 예고 나온 피아니스트들보다 더 잘나가잖아요. 역시 될 사람은 돼."

  "그거야 뭐, 일반 대중한테 유명한 거고."

  "어쨌든요. 자기 재능 찾아서 자기 길에서 유명해 졌잖아요. 그게 부러운 거죠."

  "지금이라도 발레를 배워보는 건 어때."

  "지금요? 지금에 와서 발레를 어떻게 해요."

  에디터는 농담하지 말라며 웃어댔다. 온은 피아노에서 시선을 거두며 혼자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게. 이제 와서 무슨." 

  피아니스트가 통화를 끝냈는지 방에서 나왔다. 온과 에디터는 인터뷰 마무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또 불러주세요."

  피아니스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에디터와 악수했다. 에디터는 그러겠노라며 악수한 손을 흔들었다.

  "꼭이요."

  피아니스트가 온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온은 그저 웃으며 악수만 했다.

  그 뒤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명함에서 보고 연락했다고 했다. 온은 그와 만나는 건 피했지만, 어째서인지 연락은 질질 끌고 있었다.

  '피아노 친 적 있죠.'

  아마도 이 한 문장 때문에.

  온은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이 곳을 현실로 칭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온은 다시 전당포의 잡동사니들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온은 아직 의아한 눈으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를 보았다. 순간 욱신, 하며 몸 여기저기가 아파왔다. 굉장히 무거운 것이 온 몸을 짓누르는 기분도 들었다. 온의 표정을 보고 있던 여자는 온의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제 보이니?"

  온이 돌아보니, 분명 아까는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게다가 피아노와 연결된 얇은 쇠사슬들이 온의 몸에 엉켜있었다. 온은 한참이나 말없이 피아노를 응시했다. 여자는 곰방대를 피우며 끈기 있게 온의 반응을 기다렸다.

  "정말, 이제 와서 무슨."

  여자의 입에서 내뱉어진 연기가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며 위로 흩어져 갔다.

  "그대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 그 쇠사슬은 풀었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나요?"

  "…비밀이지만. 그대의 수명은 조금 더 길었어. 운이 나빴지. 수명의 기준은 자연사거든."

  온은 한참 더 반응이 없다가, 그제서야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온은 손가락을 움직여 책상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느껴지는 감각인지, 이미 기억하는 감각의 재현일 뿐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온은 다시 손가락 끝의 굳은살을 만져보았다.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10년도 넘게 치지 않았는데, 여전히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온은 지금 자신의 몸이, 죽기 직전의 것이 아니라 살아왔던 날들 중 어느 하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장 행복했을 적인지, 아니면 가장 불행했을 적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대는 덤덤하네."

  필이 곰방대를 털다, 지나가듯 말했다.

  "두려워하지도, 죽음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래, 언젠가는 깔깔 웃어대던 이도 있었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익숙하거든요. 체념 같은 거요."

  "그런 것 치곤 무거운 걸 달고 왔어."

  여자는 웃으며 먹을 갈기 시작했다. 여자의 손이 천천히 타원을 그렸다.

  "사공은 그대 외엔 태우지 않을 거야. 그대는 그 쇠사슬을 끊어내야만 해."

  "어떻게요?"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어요."

  온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먹을 보니 조금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럼 마지막 소원을 이룬다 생각해봐."

  온은 책상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구부려 세우고 손목을 들었다. 피아노를 치는 자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 대신 내 연주를 평생 기억해줬음 좋을지도요."

  여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곰방대를 물고 짙은 연기를 내뱉었다.  

  온은 도로 어둠 속에 삼켜졌다. 어둠 속에서 한 곳에 조명이 켜졌다. 그 아래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어린 아이가 앉아있었다. 아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능숙하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 무척 열심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갈채 소리가 들리고, 아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트로피도 손에 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다른 이의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다. 아이는 허겁지겁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느새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현란한 악보가 놓여 있었다. 아이가 연주를 시작하자, 희미했던 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소리가 작아졌다. 아이는 페달을 더 힘주어 밟았다. 그러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선율이 비집고 들어온다. 아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온의 소리가 엇나가기 시작하자, 그 틈을 타 여러 개의 다른 선율들이 휘몰아쳐 들어온다.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멈추면 끝이야. 그러나 아이의 손가락이 일순 멈추었다. 이제 공간은 다른 이들의 연주들로 가득 찼다. 아이의 머리가 피아노로 떨구어지고, 이내 아무렇게나 눌린 건반들의 불협화음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이의 입술이 뭐라 움직였다. 그러자 온의 입술도 같이 움직였다. 그만 둘까. 아이는 일어나 비척비척 조명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조명 안으로, 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앉아 높이를 조절했다. 피아노 위에 놓인 여러 개의 상장과 트로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옆에 놓인 악보를 집어 확인한 온은 작게 웃었다. 악보를 펼치고 자세를 잡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은 후, 심호흡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온의 소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건 일명 '작은별 변주곡'이라 불리는 모차르트의 변주곡이었다.

  온이 웃은 이유는, 이 곡이 피아노를 그만두던 해에 마지막으로 콩쿨을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던 곡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온은 고등학생이었고, 고등학생 신분으로 콩쿨을 나오는 이들은 대개 자기 입시곡을 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콩쿨에 나갈 적에 온은 이미 피아노를 포기하기로 결심했고, 그런 의미로 초반에 배우는 모차르트 변주곡을 쳤다. 반, 짝, 반, 짝, 작, 은, 별, 아, 름, 답, 게, 비, 추, 네. 그런 자신이 온은 웃겼고, 그래서 아마 내내 웃으면서 피아노를 쳤고, 그 모습에 심사위원도 최우수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점수를 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대를 닮아 힘이 있는 소리야.

  여자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온이 미소를 지었다.

  -멈추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대의 소리로만 가득해졌을 텐데.

  온의 미소가 다른 의미로 변했다. 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소리도 나름대로 괜찮은데.

  순간 온의 손가락이 삐걱거렸다. 그러나 이내 제 속도를 되찾았다.

  "그래서 괜찮지 않아요. 적당해서."

  -적당한 건 가장 좋은 것 아닌가?

  온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난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순조롭던 온의 연주가 순간 뚝 끊겼다. 온은 언젠가 느꼈던 낭패감을 느꼈다. 한 번 멈춘 손가락은, 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의 양손이 건반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온이 멈추었던 부분부터, 연주를 재개했다.

  그 피아니스트였다.

  "같이 쳐요. 선배."

  그는 온에게 눈짓을 했다. 온은 멍하니 그를 보다가, 건반을 보았다. 온은 자신의 오른손을 그의 오른손 위에 가져갔다. 그가 웃으며 오른손을 뗐고, 그 자리를 온의 오른손이 대신했다. 둘은 연주를 함께했다.

  온과 그의 손이 동시에 건반에서 떨어졌다. 온은 깊은 숨을 쉬었다. 그가 온의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여긴 꿈이죠?"

  온은 뒷목을 긁적이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꿈이니까 물어볼게요. 내가 피아노 치는 거, 말 했던가요?"

  "아뇨. …하지만 십 년도 더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저는 당신을 보고 피아노를 계속 치게 되었으니까."

  온은 숨을 멈추었다.

  "나 기억 안나요?"

  온은 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정체모를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칼이 흩날렸고, 그 모습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오던 한 소년과 겹쳐졌다.

  "당시 저는 예고 입시에 실패하고, 굉장히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였죠. 하지만 여전히 자존심은 세서, 당연히 전 콩쿨 최우수는 제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것조차 제 것이 아니었죠. 분한 마음에 그 사람 앞을 막아섰지만, 결국 한 마디도 못 했어요."

  소년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온은 그 아이에게까지 신경써줄 여력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던 것 같다. 온으로서는 마지막 무대였다. 이 날을 기점으로, 여태까지 해온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자리였다. 앞으로 온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을 테니, 다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는 저 소년이 가엾기도 했지만, 그 울음이 부럽기도 했다. 이제 자신은 같은 이유로 울 일이 없을 것이므로.

  "그리고 며칠 뒤, 같은 학교라는 걸 알았죠. 우연히 음악실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거든요."

  온은 반 음악시간의 반주를 맡아 했고, 그 핑계로 방과 후에도 음악실에 혼자 있곤 했다. 그 날, 소년은 온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피아노 치실 거예요?' 그 질문에, 온은 일어나 음악실을 나갔다. '아니.'

  "당신이 나간 뒤에야, 전 제 질문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죠. 하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당신은 제대로 대답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떠난 피아노 의자에 앉았어요. 내게 이 자리를 넘겨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온은 작게 웃었다. 그때 온은 그저 조금 거북한 마음에 일어났을 뿐이었다.

  "물론 선배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 저는 슬럼프였고, 사춘기였어요. 뭐든 계기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는 온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온은 당시의 기분을 다시 느꼈다. 그때 거북했던 건, 자신을 올려보는 것 같은 저 눈 때문에.

  "전 그냥, 그래서 고마웠다고,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은 조금 벅찬 기분이 되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고마워요."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그 날 쳤던 곡, 다시 듣고 싶어요."

  그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어둠과 조명의 경계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온은 그의 마지막 인연을 들어주기로 했다. 다시 건반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레, 라, 시, 파, 솔, 레, 솔, 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곡, 캐논이었다.

  눈을 뜨니, 다시 전당포였다. 여자는 두루마리 위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곧 붓을 내려놓고 두루마리를 말아 끈으로 간단히 봉했다. 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고, 쇠사슬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기분은 어때?"

  "…나쁘지 않네요."

  "좋아. 이제 갈 시간이야, 유온씨."

  여자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사공에게 전해주도록 해. 그 전에 절대 열어보지 말 것. 강을 건너고 싶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열어본 사람이 있었나요?"

  여자는 웃었다.

  "그대마저 이곳을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온은 밖에 있을 남자가 떠올랐다.

  "그대보다 잊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도 모르지. 그 아이는 이미 대가를 치렀어." 

  온은 그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꿈을 꾼 만큼, 깨는데도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녕히 계세요."

  여자는 손을 휘휘 저었다. 온은 왠지 아쉬움을 느끼며 건물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온은 여자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돌아가지는 않았다. 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를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작게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온이 그 소리를 따라가자, 물비린내가 진해졌다.

  이윽고 강가가 보였다. 검은 강이었다. 강가에 나룻배가 정박해 있었고, 누군가 그 위에 큰 노를 가지고 서 있었다. 사공이었다.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공은 온을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온이 두루마리를 건네자, 사공은 펼쳐본 후 타라는 손짓을 했다. 온이 배에 오르자, 사공이 커다란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앞은 끝없는 강과 하늘이 만나, 우주처럼 깊이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어둠으로 태어나, 어둠으로 돌아간다. 이 앞에 온이 가야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사공만이 알 길이었다. 온은 마치 산 사람처럼 약간의 설렘을 느꼈다. 어둠을 향해 나아가며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산 사람은 미처 알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눈을 감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눈꺼풀을 닫고 있지만 그 안에서 눈동자만 정면으로 내려 어둡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는 기분과도 같았다. 지금 이 여정은 또 언젠가의 자신의, 언젠가의 짧은 꿈속일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온은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강을 나아가고, 나아가서 그 끝에 도달했을 때엔, 이미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과 감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온은 왼손을 들어 건반을 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레, 라, 시, 파, 솔… 솔… 솔……. 온은 문득 멈추었다.

  여덟 마디의 굴레가, 끊어졌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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