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방 Oct 03. 2021

피라미드 교실

"애들이 나랑 안 놀아줘" 

그날은 엄마한테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애들이 나랑 몇 주째 안 놀아준다고. 눈도 안 마주치고, 내 말에 대꾸도 안 하고, 나는 늘 혼자 있다고. 마치 유령인 것처럼. 학교엔 두 번 다시 안 가고 싶으니 날 좀 보호해 달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엄마" 부르긴 불렀는데, 뭐라고 입을 떼야할지 알 수 없었다. 몸이 베베 꼬였다. 나는 어째서인지 비밀 앞에만 서면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발끝을 내려다봤다. 이해가 안 됐다. 왜 내가 왕따가 되어버린 거지. 나는 늘 없는 듯 얌전히 지냈는데. 엄마는 왜 그러냐고 눈으로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애들이 나랑 안 놀아줘."

나는 '배고파' 같은 단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어투로, 간절하나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쯤 되면 그런 문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던 엄마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안 놀아 주냐, 이름을 대라, 전화번호가 뭐냐, 졸지에는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아직 다 하지도 못했는데. 엄마가 이 정도로 흥분을 하다니, 당황스러웠다. 엄마가 씩씩거리며 학교에 오는 상상을 하면 할수록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나. '야, 엄마한테 일렀냐? 어? 엄마한테 일렀냐?' 매서운 말투, 손가락질, 위협적인 몸짓. 끄아아악! 모든 게 잘못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엄마한테 절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 찾아오면 안 된다고 약속하고 또 약속했다. 그리고 그냥 친구랑 싸워서 그런 것뿐이라고 급하게 거짓말을 지어냈다. 엄마는 쉽게 믿어주지 않았지만 나 또한 끈질기게 똑같은 대답을 했다. 정말 괜찮아. 나는 괜한 말을 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킨 내가 미웠다. 나는 두 번 다시 이 일을 부모님께 털어놓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이들에겐 쉽게 흥분하지 않는 어른이 필요하다. 힘든 걸 말했을 때, 나를 더 궁지로 몰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신뢰를 주는 어른. 그때 나는 그런 어른이 곁에 없었다. 


왕따가 되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되는 게 아니다. 이상한 가방을 메고 왔다고, 맨날 똑같은 옷을 입고 왔다고, 얼굴에 여드름이 났다고, 쉬는 시간에 항상 책만 읽는다고. '이유'는 권력자가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나는 우리 반 권력자의 노트에 우유를 한 방울 흘린 죄로 왕따가 됐다. 교실의 왕따를 괴롭히는 암묵적 규칙은 이러했다. 권력자를 중심으로 피라미드처럼 아이들이 대열을 이룬다. 그리고 권력자의 명령이 떨어진다. '일동 차렷! 앞으로 김 아무개랑은 놀 수 없다.' 강렬한 눈빛과 속삭임이 아이들에게서 아이들로 신속하게 전달된다. 명령을 어기면 왕따가 되는 건 기본 상식이었고, 그것을 거스르는 아이들은 대체로 없었다. 


우리 반에 특별한 룰이 있다면 왕따를 당하는 기간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몇 주가 될지 몇 달이 될지는 권력자의 기분에 따라 달렸다. 권력자가 '쟤는 더 이상 왕따가 아니야'라고 선언하면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하게 맞아 줬다. 마치 그동안 수고했다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전까지 교실은 냉혹하리만큼 차가웠다. 문밖에서부터 한기가 느껴진다. 드르륵 뒷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를 괴롭히는 애들의 시선, 비웃음 소리에 주눅이 들고, 그마저도 관심 없다는 듯 평화롭고 여유롭게 그 시간을 누리고 있는 친구들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가야 했다. 나 혼자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매일 친구가 생기는 상상을 했다. 다정하게 우유 박스를 들고 오는 모습, 체육 시간에 같이 손잡고 강당으로 가는 모습. 학교가 끝나면 운동장에서 놀다가 헤어지는 모습. 여기서 잠깐! 내가 떡볶이도 사줄 수 있는데. 아무리 간절해도 그런 친구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나는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못 입는 바지를 찢고 그걸 다시 꿰매면서 놀았다. 그 시절 난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했다. 조용하게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이 좋았으니까. 나는 주로 책등이랑 책 표지를 구경했다. 무엇보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다른 반 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노려보거나,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편안했다. 


문제는 매일 밤 꾸는 악몽이었다. 권력자의 크고 땡그란 눈, 하얀 피부, 빨갛고 얇은 입술이 커졌다 작아졌다 끝없이 반복하면서 나타났다. 그의 입술은 말했다. "넌 왕따야. 아무도 널 안 좋아해." 나는 무서웠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숙제를 낼 때 내 공책은 빼고 걷지 않을까. 모둠 수업 때 날 안 껴주면 어떻게 하지. 체육시간에 나 혼자 놀 사람이 없어서 덩그러니 서 있는 것도 싫었다. 이제 그만 괴롭히라는 말이 목구멍을 꽉 막고 있었다. 


왕따라는 신분으로 지낸 지 두 달이 다 되어 갔을 때쯤, 권력자가 나를 해방시켜주는 선언을 했다. 

"이제 숑은 더 이상 왕따가 아니야. 대신 쟤가 왕따야." 

다들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환대를 해줬다. 그! 따뜻해 보이던 환대가 이렇게 어색한 의식이었다니. 나는 얼떨결에 피라미드 대열에 섞였다. 근데 이상했다. 왕따에서 해방돼도 여전히 난 친구가 없었다. 찢어진 바지를 다시 꿰매면서 놀 친구, 도서관의 책등을 구경 갈 친구, 떡볶이를 먹으러 갈 친구가. 주변을 둘러봤다. 애들은 행복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그래도, 일단은 왕따가 아니니까. 좋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왕따에서 해방되고 처음으로 권력자 옆에 앉을 기회가 생겼다. 미술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짝꿍끼리 준비물을 바꿔 쓰라고 했다. 나는 스스럼없이 '우리 둘이 바꿀까?' 물었다. 아마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근데 권력자는 정색하면서 뒤에 앉은 친구에게 얘기했다. "쟤가 지금 나랑 이거 바꿔쓰자고 했다. 미쳤나 봐." 나는 철렁하는 마음을 느끼며, 어디서 많이 느껴본 감각임을 깨달았다. 아, 이 놀이는 끝나지 않는구나. 않았구나. 나는 그 순간 제3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애매함. 나는 그 대열의 한가운데에서 울렁이며 서 있었다.

이전 02화 복권 한 장에 담긴 기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