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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방 Sep 26. 2021

복권 한 장에 담긴 기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게해 주세요

아홉 살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랑 아빠는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랑곳 안 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 그 가시나가, 지 아버지 복권 심부름을 갔다가 글쎄 덥석 당첨이 됐다잖아."

"오메오메 신통방통 해라. 그 가시나가 복덩이네 복덩이. 그 집은 얼마나 좋을꼬."


나는 칭찬을 먹고 자라났다. 나이 답지 않게, 말도 야무지게 잘한다는 어른들의 칭찬, 손 끝이 야물어서 안마도 잘한다는 엄마의 칭찬, 혼자 있어도 보채지 않고 귀찮게 굴지도 않는다며 기특해하는 눈빛.

어른들이 나를 향해 웃어주는 소리, 리듬감 있는 박수 소리. 그것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몸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럴수록 더 잘하고 싶었다. 


그 가시나가 당첨됐다는 복권은 어떻게 해야 당첨되는 걸까. 질투심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 복권은 내가 당첨됐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복덩이가 되어야만 하는 건데.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난 뭐든 했다. 먼저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그래야 엄마가 좋아하니까. 집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두 개의 바구니가 있었다. 하나는 오백 원짜리를, 하나는 백 원짜리를 모았다. 명절 때 어른들이 천 원, 오천 원씩 큰돈을 주면 그 돈은 책 속에 끼어뒀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모른다고 아빠가 알려줬다. 


대신 나는 친구들이랑 떡볶이도 못 사 먹고, 불량식품도 사 먹지 못했다. 돈은 모아야겠고, 먹고 싶은 건 많고.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다. 도둑질이었다. 문구점 주인아저씨가 한눈을 판 틈을 타 오징어랑 사탕을 집어 들고 잽싸게 달아났다. 생애 최초로 하는 나쁜 짓이었다. 근처 놀이터에서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 씹을수록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입고 싶은 거 못 입고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어느 날 나이 답지 않게 말을 야무지게 잘했던 아홉 살의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발버둥 치고 있는 나를 알아달라는 마음을 담아 엉엉 울었다. 엄마는 깔깔 웃었다. 어디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주워다가 그런 얘기를 하냐고. 고작 아홉 살 먹은 딸이 하는 행동이 엄마는 그저 우스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돈을 모으라고 했냐고. 엄마는 오히려 내가 이상한 것 같다고 했다. 그 순간 내 세상은 산산조각 났다. 내 행동이 이렇게 비웃음을 사다니. 칭찬받아 마땅한 내 노력이. 


아무도 모르고 있었겠지만 나는 참고 있는 게 많았다. 맞벌이 었던 엄마 아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오빠는 매번 밤 10시가 다 되도록 집을 비웠다. 혼자 집을 지키면서도 울지 않고 엄마를 기다렸던 건 진짜 내가 괜찮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나는 항상 심심했다. 집에 있으면 혼잣말을 하면서 놀았다. 그마저도 지겨우면 앞집에 있는 동생, 옆집에 사는 친구에게 '노~올~자'하고 간절하게 불렀고 못 논다고 거절당하는 일을 몇 번씩 겪어야 했다. 


저녁이면 엄마랑 오빠를 마중 나갔다. 뒤로 돌아 있다가 '엄마가 온다, 오빠가 온다. 얍!' 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뒤돌아보는 게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을 보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프면 쭈그려 앉았다 서 있기를 몇 시간 반복하면 멀리서 엄마든 오빠가 나타났다. 나는 그렇게 울지 않고 기다렸다가 오늘 뭐하고 놀았는지 재잘거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떤 눈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깊고, 일렁이는 것 같은. 나는 그 눈을 보는 게 좋았다. 안심이 됐다. 


심심한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싫은 것도, 아픈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나이답지 않게 잘 참았던 나는 사실 눈치를 많이 봤고, 무서움을 많이 탔고, 외로웠다. 내 여문 손끝으로 엄마의 어깨를 주무르던 날은 엄마 아빠가 싸운 날이었고, 항상 한 달 두 달씩 멀리 일하러 가는 아빠가 보고 싶은 날은 창가에 앉아 아빠가 오겠다고 한 날을 묵묵히 세어보며 견디는 아이였다. 나는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를 화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홉 살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재기 발랄한 능력을 다 쓰고 말았다. 


아무튼 나는 포기하지 않고 복권 심부름을 나갈 때마다 제발 당첨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게 남부럽지 않은 딸이 되는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결과는 매번 꽝이었다. 그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칭찬받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매번 꽝일 거야. 그게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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