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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방 Oct 21. 2021

계란 프라이와 햄 반찬

맛있게 먹어요

오빠는 밥을 먹을 때면 늘 계란 프라이와 햄을 찾는다. 그 두 반찬만 있으면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다. 오빠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계란과 햄만큼은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새언니는 그럴 때마다 '또 야?' 하는 얼굴로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럼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어릴 때 못 먹어서 그래. 못 먹어서." 하고는 상기된 목소리로 수십 번은 더 들어본 이야기를 시작한다. 학생 때 도시락 반찬으로 맨날 김치만 싸간 이야기, 엄마가 몇 달 동안 용돈을 안 줘서 울면서 학교 간 이야기. 그쯤 되면 새언니는 졌다는 듯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계란 두 알을 깬다. 마흔한 살의 오빠는 그제야 흡족한 얼굴이 된다. 


오빠는 나보다 11살이 많다.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5살쯤인데, 빠른 년생이었던 오빠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방이 한 칸 딸린 슈퍼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달동네로 반지하 방으로 오빠를 데리고 수십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고 했다. 슈퍼 집도 모양새만 슈퍼지 속은 변변치 못했다. 잠자는 방, 술과 담배, 과자를 진열해 놓는 곳이 다 합쳐서 5~6평 정도 될법한 작은 공간이었다. 대단한 물건을 파는 곳이라기보단 그저 동네 주민들 쉼터나 다름없었다. 


우리 네 식구는 방 한 칸에서 다 같이 낑겨 잤다. 문제는 여름이었는데, 서로 살을 맞대고 잠을 청하기엔 지독하게 더웠다. 그 부대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아빠는 오빠를 데리고 집 앞에 있는 놀이터로 나가 잤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난 오빠는 퉁퉁 부은 얼굴로 몸 여기저기를 긁었다. 그리고 내게 모기한테 뜯겨 새빨개진 팔을 보여줬다. 모기에 물린 피부는 부풀고 부풀어서 하나로 합쳐졌다. 만져보니 열이 나고 있었다. 오빠는 십자가 모양을 만들면 가렵지 않다며, 손톱을 세워 몸 여기저기에 십자가를 새기기 바빴다.


슈퍼 집은 화장실이 집 안에 없었다. 볼일을 보거나 물을 사용하기 위해선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집 안엔 항상 요강이 있었다. 나는 엄마가 대야에 받아온 물로 방 안에서 간단한 세수나 양치질을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지만, 오빠랑 어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모습을 오래 기억했던 나는 엄마 따라 이웃집에 놀러 가는 날이면 우리도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이사 가자고 졸랐다. 엄마는 그 일을 내가 클 때마다 얘기했다. 네가 그랬었어. 기억나?


사실 어렸던 나는 집 안에 화장실이 없는 게 무엇인지, 가난이 무엇인지, 가난 때문에 가족들은 매 순간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고, 그래서 큰 불편함 없이 자랐다. 그럴싸한 방과 화장실은 없지만, 난 방에서 씻을 수 있고, 볼일을 볼 수 있고, 잘 수 있었으니까. 어린 내가 고통을 피해 갈 수 있도록 나보다 조금 더 큰 오빠와 엄마랑 아빠가 항상 상황을 조정해 줬으니까. 그저 나의 일과는 집에서 파는 불량 식품을 몰래 챙겨 놀이터로 나가서 애들과 나눠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항상 두 손에 먹을 것이 들려 있던 나는 애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달랐다. 그저 천진난만한 아이였던 나와는 달리 오빠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하루는 오빠가 학교 끝나고 울면서 집에 왔다. 교복이 더러워져 있었다. 오빠는 방 한 귀퉁이로 가서 고개를 파묻었다. 언제나 어른 같았던 오빠의 눈물을 보자 덜컥 무서워졌다. 나는 오빠와 대각선으로 떨어져 앉아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오빠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가진 건 불량식품 사탕과 세일러문 도장뿐이었으니까. 한 칸짜리 방에서 오빠와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그렇게라도 오빠에게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 전부였다. 한창 예민했을 시기의 오빠가 울 수 있거나, 우울해하거나, 원망할 수 있는 공간은 언제나 그 정도 크기였다. 


지금도 타지 생활을 하고 있는 아빠는 그때부터 우리를 떠나 먼 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엄마는 최선을 다해 돈을 모았다. 변변한 집을 갖기 위해서. 오빠 도시락에 슈퍼에 널리고 널린 참치캔 한통 맘대로 못 넣어주는 게 마음 아파서. 친구들이랑 떡볶이라도 사 먹으라고 줄 용돈이 없어 울려서 학교를  보내는 게 애가 닳아서. 엄마는 그 좁은 집에 남의 집 애기를 데려오고, 천 뭉탱이를 받아 오고, 마늘을 받아왔다. 엄마는 쉴 새 없이 손을 놀렸다.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한 푼도 쓰지 않고 통장에 넣었다. 그렇게 엄마랑 아빠는 우리를 태운 배가 한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쉴 새 없이 노를 저었다. 나는 그 배안에서 신나게 놀았고, 오빠는 작은 덜컹거림에도 쉽게 멀미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내가 초등학생이 될 때쯤 우리는 슈퍼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갔다. 오빠 방도 생기고, 집 안에 화장실도 생겼다. 나는 갑자기 집이 바뀐 게 신기했다. 마치 요정 할머니의 마술 같았다. 오빠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형태의 집과 형편 속에서 살았으니 나랑은 다른 감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빌라에 발을 딛는 순간, 오빠는 처음으로 안정감 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종종 나에게 오빠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큰 줄 아느냐고 얘기한다. 오빠가 어릴 때 햄이 그렇게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걸 못 사줘서 지금도 저렇게 자기 각시한테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라고. 오빠가 겪었던 시간을 그저 잠깐 맛만 본 나는 정확히 상상할 수 없다. 식구들과 어떻게 해도 분리되지 않는 그 끈적끈적한 나날을. 가난과 굶주림을. 집이 아닌 곳에서 잠들었을 시간을. 11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만 쏙쏙 피해 갔던 그 순간들을 말이다. 


이제 오빠는 가족들한테 사주는 것은 항상 넘치게 사주려고 하고, 부족한 것, 낡은 것을 못 견뎌한다. 아마 가난한 어린 시절이 오빠에게 남긴 흔적인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지나치게 많다고 말리기도 하고, 때로는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기도 한다. 상처라던지 아픔이라던지 하는 것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 누군가에겐 철없어 보일 마흔한 살의 오빠가 하는 반찬 투정과 매번 들려주는 그 똑같은 이야기를 나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듣는다. 계란과 햄을 고르면서. 굶주린 어린 시절의 오빠에게 대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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