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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방 Oct 20. 2021

숨바꼭질

못 찾겠다 꾀꼬리

그 애는 자주 없어졌다. 2년에 한 번씩 나타나 아무렇지 않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마치 어제도 연락했다는 듯,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다정한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나는 그런 그 애가 야속해 툴툴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락은 왜 안 됐던 건데. 그럼 그 애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내게 팔짱을 꼈다.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사실 나도 다시 돌아온 친구를 있는 힘껏 반기는 중이었다. 우린 서로 보고 싶었다는 말만 쏙 빼놓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중3 때 만났다. 그 애는 웃을 때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별명은 우유. 항상 애들에게 애교 있는 웃음을 크게 흩뿌리던 친구. 그 애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약간의 엉뚱 발랄함. 하지만 나랑 단둘이 있을 땐 웃음기를 삭 거둔 채 무표정하게 있었다. 우유는 내게 전날 밤 집에서 일어난 일, 아무리 애를 써도 잊을 수 없는, 미처 다 소화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우유가 겪은 일이 '진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 늘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야기가 다 끝나면 우유는 늘 그렇듯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하하하고 웃었다. 이 현실이 우습다는 듯.


우유는 어디서든 내게 이야기했다. 운동장 끝 포도나무가 엉성하게 자라난 한 귀퉁이에서, 대걸레를 빨다 말고 숲 속에서, 모두가 하교한 벤치에서. 여기저기서 속삭였다. 우유는 항상 일찍 죽을 거라고 얘기했다. 뭐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하냐고. 그럼 나는 운동장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할 말을 찾았다. 네가 살아야 할 이유. 네가 살아야 할 이유. 제발 무슨 말을 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가 답답했다. 마음은 간절한데 그 어떤 대답도 우유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내가 괴로워하면 우유는 웃었다. 항상 나보다 먼저.


고등학생이 된다고 했을 땐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상황은 여전히 암담하고, 축축한데 시간만 빠르게 흘러 서로 다른 교복을 입고 서 있다는 것이. 교복에 박힌 우유의 이름을  오래 쳐다봤다. 우유는 매일 선생님한테 맞는다고 했다. 교복이 짧다고, 숙제를 안 해 왔다고, 시험을 못 봤다고. 우유의 ‘어젯밤’은 변함없이 살벌했고, 그 애는 점점 더 작아져갔다. 어느 날 우유는 불쑥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자퇴할 거야.”


그때 나는 어른들이 할 법한 이야기를 했다. 자퇴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자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중졸은 살기가 힘들대. 우유는 내게 왜 자퇴를 하고 싶은지 한참을 설명했다. 그래도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피로감이 일렁이는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칙칙 두어 번 어설픈 솜씨로 라이터를 켰다. 후 하고 내뱉는 숨에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한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우유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른들한테 담배 피우는 거 들키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정작 우유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우유가 1년에 한 번씩, 2년에 한 번씩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난 말할 상대가 사라져서 쓸쓸했고,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처럼 자주 울었다. 1년 만에 나타난 우유는 자퇴를 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러 친구를 만나고 있었지만 너무 많은 친구를 만나 피곤한 일이 많아진 눈치였다. 오랜만에 우리는 어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유는 죽으려고 했다고 운을 뗐다. 손목을 그었는데, 엄마한테 들켜서 죽지 못했다고. 정신과에서 준 약을 먹으면 하루 종일 잠만 잔다고. 우유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리고 우유는 사라졌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나 죽으려고 했어.' 그 말을 하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어떤 도움이 필요했던 건지. 눈을 감고 우유의 손을 꼭 잡아주는 상상을 한다. 매일 밤이면 불안이 온몸을 집어삼킬 것 같아 두려울 때, 가슴은 세찬 비를 맞듯이 툭 툭 툭 뛰고, 한기를 느끼며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릴 때. 이 감각을 진정시킬 방법은 조용하게 죽는 방법뿐인 것 같을 때. 그런 날이면 우유는 내게 '죽고 싶어'라고 말했던 걸까. 그 외로움과 막막함을 18살의 우유는 혼자 견뎠던 걸까.


우유를 마지막으로 본 게 6년 전이다. 그 시절 우유는 어떤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는 감히 우유랑 그 시절을 함께 통과하려고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사라졌고, 2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도 우유는 늘 그랬던 것처럼 애교 섞인 웃음을 띠며 내게 오지 않았다. 우유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우유랑 함께했던 모든 시절 나는 항상 벙찐 얼굴로 그 애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젠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생겼는데. 해줄 수 있는 말도 많아졌는데. 이번엔 내가 꼭꼭 숨은 우유를 찾을 차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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