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그리고 사진감
할 말이 없는데 말을 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혀 나오지 않는다. 할 말이 있는데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던 이에게 겨우 연결이 되면 생각할 것도 없이 말이 술술 나온다. 네가 지난달에 빌려갔던 그거 있잖아. 내가 내일 꼭 필요해서 그러는데, 지금 퀵을 부를 테니까… 엄마, 엄마 김치가 다 떨어져 가지고 이번 주말에 가지러 가려고 하니까…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슨 말에 해당하는 것이 메시지다.
할 말이 있긴 한데 꺼내기가 어려운 말일 때도 말문이 막힐 수 있다.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카톡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하루종일 생각한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제수씨는 어떻게 지내? 애들은 잘 있고? 생각나서 전화했어. 한 잔 한지 참 오래됐다. 그나저나 부탁할게 좀 있는데… 할 말을 어떻게 전달할지 하루종일 고민한 전략대로 차츰 이야기를 꺼낸다. 여기서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 테크닉이다.
글쓰기 교육을 듣거나, 소설가가 인터뷰한 걸 보면 글감에 대한 이야기가 왕왕 나온다. 어디서 그렇게 글감을 잘 찾으세요? 좋은 글감을 메모해 두시나요? 저는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부족한데 좋은 글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 쓰는 사람들은 글감, 즉 좋은 소재를 찾는데 집중한다. 항상 메모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들어온 점이기도 하다.
좋은 소재를 찾은 다음에는 그 소재를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한다. 두괄식으로 결론을 먼저 내버릴까? 미괄식으로 안달 좀 나게 해 볼까? 후반부에 반전을 넣으면 더 놀라게 할 수 있지 않을까(주제가 더 강조되지 않을까)?
글쓰기는 백지에서 시작한다. 사진처럼 피사체가 있지 않다. 누군가의 글을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말할지부터 스스로 생각해내야 한다. 할 말이 정해져야, 어떤 전략으로 그 말을 하지 하는 테크닉이 따라온다.
그런데 사진은 피사체라는 것이 있어 셔터를 누르면 일단 찍히기는 한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를 들면 할 말이 없어도 말문이 막히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찾는 하고 싶은 말(글감)이 없어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래서 검지가 셔터에 닿으면 우리는 할 말도 없으면서 어떻게(테크닉) 말할지만 고민하는 실수를 자주 겪는다. 어디선가 본,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의 테크닉을 따라 하면서도 정작 그 사진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본인도 모른다. 테크닉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메시지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같은 이야기라도 그이가 하면 훨씬 더 재밌을 때가 있다. 그는 이야기를 전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테크닉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뻔한 이야기라도 어떤 테크닉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재밌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문장과 수사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작가가 생각해 낸 글감을 글로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진에서도 테크닉을 연구하는 것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용(메시지)보다 테크닉이 더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필름 시절에는 필름값이 아까워서라도 무슨 말을 할지 한번 더 고민하는 찰나가 있었다. 디지털이 되고 나서는 할 말 없는 사진이 많다. 할 말이 없는데 셔터만 누르는 것을 피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카메라를 드는 순간 셔터를 누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사진가는 "어떻게" 이전에 "무엇을"부터 고민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글감이 풍부해서 얼른 글로 써 내려가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진가는 얼른 표현해내고 싶은 사진감의 심상이 가슴속에서 메아리칠 때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