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신발을 잘 못 신는다.왼쪽 오른쪽 구별도 잘 못하고, 끈 묶기는 더욱 서툴다. 그래서 신발을 신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어른은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신발을 착착 신지만, 아이들에겐 낯설고, 처음인 것.
<시간이 흐르면>이라는 동화책이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시간이 흐르면, 아이가 자라게 되면, '어려웠던 일이 쉬어지기도 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신발 끈을 잘 묶게 되는 어린아이 모습과 함께. 저자는 이 책을 어린이와 같이 읽다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
그러자 어린이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저자는 이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고 한다. 아. 그렇지. 어린이도 못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하지만 어른의 조바심은, 아이를 쉽사리 못하는, 서툰, 어색한 이란 단어로 가둬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 줘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성장하는 그 과정을.
제가 어렸을 때는요
요새 우리 아들도 요 말을 종종 한다.
"옛날에, 내가 3살 때.."
이 모습을 보면 참 귀엽다. 아들. 너 5살인데. 옛날에. 어렸을 때. 3살 때라고? ㅎㅎ <어린이라는 세계>에서도 이렇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귀여운 아이들이 등장한다.
"제가 옛날에 로보카 폴리
진짜 좋아했는데.
지금은 스파이더맨을 좋아해요."
(스파이더맨 애호가. 9살)
저자는 이 말을 듣고 처음엔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아. 아직도 어린 나이인데 이렇게 말하다니. 하지만 저자는 귀엽다. 당황스럽다를 넘어서,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의미를 파헤쳐 본다.
아이들이 3,4년 전 일을 두고 힘주어 '옛날'이라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정말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흔 살의 3년 전과 열 살의 3년 전은 똑같은 기간이라 보기 어렵다. 살아온 날 비율로 따져보면 열 살의 '일곱 살' 때는 마흔 살의 이십 대 후반인 것이다.
문득, 열 살 때의 나를 떠올렸다. 열 살의 나는, 십대가 되었다는 생각에 "오. 나 다 컸어. 이제 어른이야!"라고 엄마에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엽네 ㅋㅋ) 열 살에게 그동안 살아온 10년은 어마어마한 시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마흔 살의 나는 이제 10년이란 쏜살같이 지나가기도 하는 시간임을 안다. 열 살의 나를 바라보는 서른다섯의 엄마는 또 어떤 느낌이었을까? 귀엽다고 느꼈을까 철없다고 느꼈을까?
이런 식으로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다 보면
나의 과거와 내 아이의 과거로 퐁당 빠져든다.
누구나 겪는 어린아이라는 시기.
그 달콤하고 모든 게 새로웠던 세계로 말이다.
남의 집 어른
이 책은 어린이에 대한 '재발견'과 함께 저자의 개인사를 같이 적고 있기도 하다. 사실 40대 중반인 저자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다.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쓸 때도 망설였다고 한다. 내가 아이가 없는 사람인데. 이 책을 과연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우려. 걱정.
사실 아이를 뒤늦게 낳은 나로서도 아이가 있음 / 아이가 없음의 세계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걸 느낀다. 이 두 세계는 만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 어린이는 귀여우니까. 내 아이도 귀엽지만 남의 집 아이도 귀엽지 않은가!
저자는 수업을 하다가 한 아이에게 예쁜 초콜릿을 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초콜릿을 먹지 않고 가만히 두다가, 불쑥 묻는다.
"녹을까요?"
"응? 뭐가?"
"초콜릿요. 이거 집에 가면 녹을까요?
엄마랑 아빠랑 먹으려고요."
저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예쁜 초콜릿을 엄마 아빠에게 가져다주고 싶어 고민하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그러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도 떠올렸다. 자신이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도 떠올렸지만,자신이 주었던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아이는 부모에게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진 않는다. 작은 손을 뻗어 사랑의 표현을 가득 내민다. 다만 서툴러서, 작아서, 온전히 가닿지 않는 것이다. 녹아버리는 초콜릿처럼.
이처럼 엄마가 되지는 않지 않아도, 우리는 수많은 남의 집 아이를 마주치며 살아간다.이 아이들은, 비록 내가 이 아이의 엄마가 아니지만 충분히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어쩌면 내 아이가 아니어서 더 예쁘게 보일지도 모른다. 내 아이가 맞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남의 집 이모' '남의 집 할머니'가 되어 아이의 초콜릿이 녹지 않도록 같이 걱정해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