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학 시절, 돈이 없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그와 대조적으로, 늘 깨끗한 와이셔츠에 회사원처럼 다니는 선배가 한 명 있었다. 그 선배는 류시화 시인을 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하고, 자연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20년이 훌쩍 지나고, 이 둘은 한 좌담회에서 마주하게 된다. 시인은 선배에게 물었다. 왜 매일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었냐고.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배 역시 류시화 시인처럼 가난해서 장학금을 받기 위해 어떻게든 신문사 편집장으로 일해야 했으며, 그래서 항상 단정한 복장을 해야만 했다고.
그들은 20년 만에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시인은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둘 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몸짓을 다했던 것.
그들의 지향점은 다르지 않았다.
시인은 시인의 방식대로
선배는 선배의 방식대로 했던 것일 뿐.
이 두 길은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같으며,
동일한 목적지에 이른다.
따라서 추구의 여정에는
두 가지 잘못밖에 없다.
하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
또 하나는 끝까지 가지 않는 것.
누구도 우연히 오지 않는다
우연한 만남과 인연이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 경우도 있다.
어떤 만남은 삶을 뒤흔들어 놓지만
어떤 만남은 잔잔한 파도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살면서 마주친 그 무수한 인연들.
그들을, 당신들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인연이
한 권의 책이 되기도 하고
영화나 음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섭리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고 믿는다.
지금 내 삶에 그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온다.
사람들은 이유가 있어 내 삶에 나타나고
때가 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당신이 내 인생에 들어왔다. 나는 당신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 우리의 만남은 이 커다란 우주에서 축복과 같은 선물이므로. 어쩌면 이러한 만남만큼이나 이별 또한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별이라는 것은, 그 인연이 주는 의미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