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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 Monkey Feb 17. 2022

그림에 완전히 몰입하고 싶다면, 제주도 '빛의 벙커'로

제주도 여행 중에 서귀포 성산에 위치한 '빛의 벙커'라는 미술관에 다녀왔다. 이제 미술관은 평면적인 그림이나 정지해있는 조형물만을 전시하는 게 아닌 '미디어 아트'로 예술의 영역을 넓히면서 더 몰입이 가능해지고 다양화된 전시를 제공하고 있다. '몰입형 미디어 아트'라고 불리는 빛의 벙커의 <모네, 르누아르... 샤갈>전을 보고 왔다.


너무 오랜만에 가는 제주도 여행이라 어디를 들러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성산에 2박을 하게 되면서 숙소 근처에 빛의 벙커가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대충 미디어 아트를 전시한다는 것만 알고 갔는데, 전시를 보고 난 감동이 너무 커서 후기를 꼭 남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빛의 벙커'라는 이름 앞에는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평소 이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왜 빛의 벙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알아보았다.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란?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공간과 작품이 만나 관람객에게 독특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는 전시이다.
전시실에 입장하는 순간, 관람객은 수십 대의 빔프로젝터와 스피커에 둘러싸여 거장의 작품과 음악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다. 전시실 곳곳을 자유롭게 돌며 작품과 내가 하나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의 특징이다.


왜 프랑스라는 이름이 붙냐 하면, 이러한 몰입형 전시는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일 처음 프랑스 레보드프로방스 지역에 '빛의 채석장(Carrières de Lumièrer)'이 2012년에 오픈했고, 폐쇄된 채석장 동굴에 미디어아트를 도입해서 '빛의 채석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후, 프랑스 파리에 '빛의 아틀리에(Atelier Des Lumières)'라고 하는 전시관이 오픈했고, 파리에 있는 낡은 철제 주조공장을 개조하여 전시관을 만들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2020년 프랑스 보르도에는 '빛의 수조(Bassins de Lumières)라는 가장 큰 디지털 아트센터가 오픈했다. 보르도의 옛 잠수함 기지를 개조하여 만들었다 해서 '수조'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 벙커인가?

제주도에 국가기관 통신시설로 이용되는 비밀스러운 벙커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해저 광케이블 통신망을 운영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오름 안에 벙커를 지어놓고 흙과 나무로 덮어 마치 산이나 오름처럼 보이도록 해 놓았던 것이다. 그 장소의 이름을 따 프랑스 식으로 '빛의 벙커(Bunker de Lumières)'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벙커는 프랑스 몰입형 아트를 전시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한다.

2018년 11월에 개관하여 클림트 전시를 시작으로, 고흐 전시와 지금 세 번째 전시인 <모네, 르누아르... 샤갈>전을 상영하고 있다. 프랑스 이외에서 개관한 빛의 전시관 중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몰입형 미디어 아트, '빛의 벙커'


미술책에서 모네, 르누아르, 샤갈의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그림들이 다양하게 레이어들이 쪼개져서 움직이고, 음악에 따라 다양하게 이동하고, 새롭게 재창작되어 벙커라는 큰 공간에서 펼쳐진다.

원래 미술관에 가면, 그림은 벽에 가만히 걸려 있고 관람객들이 돌아다니며 그림을 감상한다. 그것과는 달리 관람객은 그저 앉아서 감상만 하면 되고, 작품들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림으로, 소리로, 공간으로.

빛의 벙커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지만, 어느새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아서 영화 보듯 집중하며 전시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정말 놀라웠던 건 그저 백여 년 전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었던 것들이 현대 기술로 다양한 레이어들로 쪼개지고 합쳐지고 덧붙여지고 움직이며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할 때, 단순한 전시가 아닌 마치 파워포인트에서 다양한 슬라이드 쇼 효과를 본다고나 할까? 각 작품마다 특색 있게 재미있는 모션으로 등장한다.

제일 인상 깊었던 건 보나르의 누드화였다. 누드화가 그냥 전시되는 게 아니라 창문이 등장하고, 그 창문이 아주 은밀하게 열리는 효과를 통해 내가 마치 그 그림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파울 클레 작품에서는 인물화들이 음악과 합쳐져 노래를 부르는 듯한, 살아있는 생동감을 선사한다. 단순한 그림들이 이러한 효과를 내는 것이 아주 놀라웠다. 전시를 넘어 하나의 공연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10+35분간의 전시를 다 보고 나서, 시간만 많다면 푹 눌러앉아서 몇 번이고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했다. 왜 몰입형 미디어 아트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아쉽게도 다음 일정이 있어서 발걸음을 돌렸지만, 입장료 18,000원이 아깝지 않은 전시였고 모네, 르누아르, 샤갈, 파울 클레 외에도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벙커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분은 물론이고 영화를 좋아하는 분, 음악을 좋아하는 분 다양하게 취향을 저격하는 미디어 아트, 정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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