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정성을 쏟은 Epril 세미나가 딱 한번으로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까칠한 일민형의 잔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프로그래밍에 대한 자신이 있던 내가 자동화 테스트 실습을 라이브코딩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연습할 가능성은 0% 였을 것이다. 암튼 살면서 처음 '돈을 받지도 않는 행사'를 위해 일주일을 온전히 쏟아부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경험이었다. 그렇게 연습을 했어도 시연 중에 잠깐 착각하여 테스트 결과가 이상하게 나왔다고 당황할 때 청중이었던 재성이형이 상황을 이해하고 거들어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일민형이 꿈꾸던 스프링 컨설팅, 다시 말해 유럽이나 미국에나 있던 스프링 컨설턴트가 한국에 둘이나 있는 상황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글로벌 위기와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새로 설립하는 IT컨설팅회사 창립 멤버로 합류하며, 이전의 (개발하는 IT컨설턴트) 생활로 돌아갔다.
어디서 이런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호주로 돌아가는 일민형과 함께 일할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 나는 Korea Spring User Group(한국 스프링사용자 모임)을 만든다. 당시 내 머리속의 공식은 KS+UG였다. 일민형은 KS를 맡고 나는 UG를 맡았다. KS는 한국 스프링 일인자를 말하며, UG는 내가 2006년 바르셀로나 컨퍼런스에서 Rod Johnson을 처음 봤을 때 함께 경험했던 User Group이라는 이상향을 말한다. 나는 User Group 리셉션 자리에서 유명개발자와 만날 수 있고, 개발자들끼리 서로 기회를 주고 받는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 그걸 해보고 싶었다.
그 후 KSUG에서 나의 주요 일은 전화로 후원이나 발표를 부탁하는 일이었다. 9번의 세미나 장소 대여를 하고 네이버(성기준박사님 후원)와 다음, 국민대(김인규 교수님) 등의 후원을 받았다. 발표자 1순위는 Toby 일민형이고, 2순위는 일민형이 지목한 사람이고, 3순위는 우리가 키운 후배들이었다. 다 안되면 행사 준비를 하는 내가 발표까지 병행하기도 했다.
암튼 그런 재능 기부를 하며 내가 기대한 바는 개발자들이 제발 쑥쓰러움을 이겨내면 우리도 언젠가는 서양 개발자들처럼 서로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가 동력을 잃을 즈음에 성철이형에게 운영자(성철이형 표현으로는 '큰 일꾼') 역할을 넘겼다.
그리고 또 하나의 유산이 있었다. KSUG가 있기 전에 내가 했던 두 번째 스터디(라고 쓰고 공개 무료 강연)였던 Agile Java Network에서 성장한 기선이가 KSUG 인연으로 봄싹이라는 본격 코딩 스터디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존 개발자와 MS 개발자를 거쳐 유명 유튜브 강사가 되었다. :)
그때 함께 시도했던 번역이 있었는데, 그 책이 그 유명한 Eric Evans의 DDD 이고, 내가 위키북스 편집장에게 꼭 번역을 하자고 주장했다. 내가 번역을 할까 했는데 욕심을 부린 어떤 개발자 양반이 고집을 부려 양보했다. 자기 역량을 몰랐던 그도 포기한 번역을 후배인 대엽이가 마무리했다. 대엽이는 (당시는 개발자였는데) 그 인연으로 지금 위키북스에서 일한다.
지난 토요일 토비 형과 서귀포에서 만났다. 형이 요청해서 두 아들을 대동하고 만났다. 아내에게 부탁을 하고 만난 갈치집에서 형은 보자마자 우리 아이들에게 13년전 내가 형의 3살짜리 큰 아들과 골드코스트 해변에서 손을 잡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 탓에 KSUG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User Group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 조용하게 베터코드 OSS 저장소를 운영한 지도 이미 3년이 되었다. 언젠가 일민형 말고도 오픈소스를 매개로 교류하는 동지들을 또 만나기로 하며 지나간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KSUG의 로고는 지금은 경리단길 디자인 회사 사장님이 된 내 친구가 내 부탁으로 허접하지만 그래도 무상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고맙다. 용철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