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은 주로 재택, 나는 총 44층 규모에 방콕 센트럴에 위치한 콘도 25층에서 산다.
딱 회의를 마치고 물 한잔 마시려고 엉덩이를 떼었는데 천장에서 뭔가 쾅쾅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우리 집 위에서 공사를 하나? 3년간 이 집에서 살면서 한 번도 층간 소음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희한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우리 집 공간 전체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현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이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실로 나와보니 더 크게 느껴졌다. 실제로 건물이 움직이고 있구나. 진동이 아니라 너울 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현실일 수가 있나? 잠시 뇌가 버벅거렸다.
몇 초 뒤 이게 현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공포감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건물이 붕괴하고 있다고 거의 확신이 들었다. 벽에서는 여기저기서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내일모레 이사 가려고 했는데, 며칠만 더 일찍 갈걸.
복도에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압력 때문인지 잘 열리지 않았고, 겨우 힘을 내어 문을 열었더니, 복도 코너 저 끝에 한 남자가 상의도 입지 못한 채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게 보였다.
"Help!"라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What's happening?" "Should we evacuate?"라고 복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상의를 탈의한 남자는 내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I don't know!"라고 하더니 비상구 계단 쪽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문을 다시 닫고, 잠시 생각을 했다.
건물이 붕괴한다면 나는 어차피 죽을 테니, 그래도 도망이라도 쳐보자!
잠깐, 혹시 어딘가에 매몰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방에 다시 들어가 휴대폰까지 챙겼다.
내가 헬멧이 있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상황에 무슨 정신인지 머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문 앞에 있던 캡 모자까지 쥐었다.
이제 문 밖을 나가면 곧 죽을 수도 있으니 오빠에게 카톡을 보낼까 찰나 생각을 했다.
아마 보냈다면 이렇게 보냈을 것이다. "건물이 붕괴 중이야 뭔 일인지 모르겠어. 다들 잘 있어"
그러나 그런 시간을 쓴다는 게 어리석다는 판단이 들었고, 즉시 문을 세게 당겨 열었다.
우리 층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집 호 수에 제일 가까운 비상구 계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색할 정신은 미처 들지 않았고, 내가 아는 조금 먼 비상구 계단으로 마구 뛰어갔다. 뛰어가는 동안 계속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었다.
계단에 진입하니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가 아래로 뛰어가고 있었다. 마음은 다급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때는 계속 건물이 붕괴하는구나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내려갔지만, 아마도 몇 층쯤 내려왔을 때 지진은 멈췄던 것 같다.
중간에 내려가는데 어떤 노인은 잘 걷지 못해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마음이 안쓰러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도 두려운 마음에 지나쳐 걸음을 재촉해 내려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진이란 생각은 단 한 톨도 못했다. 지진을 겪어본 적도 없는뿐더러, 지진이 오는 도시도 아니기에.
지층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마음도 점점 안정되어 갔다.
건물을 탈출하여 바깥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이미 탈출하여 건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지진은 끝난 상태였지만, 건물 여기저기서 물이 새고 있었다.
샤워 가운을 입고 내려온 사람, 맨발로 내려온 사람도 허다했다.
여진이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콘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구조물이 없는 Open Place로 가야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은 정말 사방이 건물로 둘러 쌓여 있어 불안했다. 그나마 작은 광장 같은 곳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땅바닥에 앉아 기다렸다.
귀여운 아기, 강아지를 데리고 탈출한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미소가 지어졌고,
위기 상황이 되자 서로 위로하며 갑자기 친구가 된 이웃들을 보니 새삼 인류애가 느껴졌다.
계단에서 탈출할 때도, 바깥에서 몇 시간씩 대기탈 때도, 생명에 위협이 되는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대개 친절했고, 서로 배려하며 베풀었다.
회사 메신저에서도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메시지가 왔다 갔다 했다.
콘도는 여기저기 배수관이 터지고, 크랙도 많이 갔기 때문에 당장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여 호텔을 예약했다. 내 방 문은 아직도 활짝 열려있을 것이다.
어젯밤 꿈에서 몇 번이나 지진이 왔는지 모르겠다.
뒤숭숭한 날이다.
3월 말 한국은 눈이 오고, 야속한 산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미얀마에서는 수많은 유적지가 파괴되고, 유치원이 붕괴되고, 집계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어제 이 도시에서는 공사 중이던 고층 건물이 무너졌고, 어제 나와 같이 탈출하던 어떤 노인은 천장에서 떨어진 잔해를 맞고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