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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Oct 17. 2018

감정을 써야 하는 이유

유시민의 공감필법이라는 책을 읽다가 생각해볼 만한 문장에 밑줄을 쳤다.

말과 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확하게 인지하지도 못하니까요. 감정과 생각은 언어로 표현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어요.
문자 텍스트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어떤 생각과 감정도 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 모든 것은 문자로 명확하게 표현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 책에 이어 정재승의 열 두 발자국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게 비슷한 인사이트를 주었다.


교수는 챌린저호가 폭발한 다음 날, 자기 수업을 듣는 106명의 학생에게 이 불행한 사건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들었는지 물어봤어요.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같이 있다가 이 소식을 접했는지를 종이에 상세히 쓰게 했지요. 그러고 나서 2년 반 후, 그 학생들을 자신의 연구실로 다시 불렀어요. 그리고 면담을 한 거죠. 그 면담에서 나이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2년 반 전 챌린저호가 폭발했을 때 당신은 그 소식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들었나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의 25퍼센트가 완전히 다른 기억을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엉뚱한 곳에서 자기가 그걸 들었다고 말하더라는 거지요. 게다가 나머지 학생들의 대다수도 세부사항이 마구 틀리더라는 거예요. 겨우 10퍼센트도 안 되는 학생들만이 그때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이 연구 결과는 아무리 인상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2년 반이 지나면 그것을 정확히 기억할 가능성은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과장되고 지워지죠.(중략)

그런데 이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제부터 입니다. 나이서 교수는 잘못된 기억을 얘기했던 90퍼센트 학생들에게 그들이 2년 반 전에 쓴 종이를 보여주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녹화했습니다. 그들은 과연 진실과 대면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중략)

학생들 중 상당수가 "교수님, 글씨체를 보니 제가 쓴 글이 맞고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는데, 근데 이거 아니에요! 제 머릿속에 있는 게 맞아요!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게 사실입니다."라고 확신하더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내밀어도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만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거예요.


정말 문자로 배출해내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는 걸까?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감정이나 생각의 경우라면, 유시민 작가나 정재승 교수의 말이 일리가 있다.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것들은 쉽게 왜곡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현재 중심으로 기억하게 된다. 복원할 수도 없으며 누구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내 감정을 글로 써본 일이 까마득했다. 어느 순간부터 G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처음에 쓰지 않게 된 건, 먼저 편지를 받아야 답장을 쓰겠다는 어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내 감정이 어떤지 들여다본다는 것에, 펜을 든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곤 했다.


가끔 심하게 다툴 때면 몇 년간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내 마음이 순식간에 위태로워지곤 했다. 그때 쓴 일기를 보면 (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만 일기를 썼다.) 그 간의 평화로웠던 수많은 날들을 가차 없이 가치 절하를 해놓았다.


사랑의 마음도 변한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삼 년이 되었을 때, 그리고 지금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내 감정에 대해 써놓은 일기나 편지가 없으니 내 불확실한 기억력에 의존해 그때의 나를 회상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기준으로 자의적으로 회상할 수밖에 없다. 또는 아예 과거 감정의 변화를 잘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편지를 써야겠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지금의 내 생각과 감정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이 있었던 사실로 기억되고 싶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정확히 한점 한점 찍어가며 나는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다고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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