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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Mar 01. 2019

혼제주


올해 서른여섯인 선배 Y는 소개팅한 남자와 썸을 타면서 멘탈이 오락가락했다. 상대가 사뭇 마음에 들었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 사람 연락 한 번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렸다. 그런 그녀를 지켜본 사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해 보라는 조언을 했지만 먼저 만나잔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답답했는지 S 선배가 말했다. "에이. 선배님, 무서울 게 뭐 있어요. 그냥 먼저 만나자고 해봐요. 아니면 아닌 거지. 소개팅했다가 잘 안 되는 거, 우리 나이에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요."


이 말에 Y 선배가 정색하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나이 든다고 강해지는 거 아니야.

거절당하면 똑같이 상처 받는 거야. 절대로 강해지는 거 아니야, 나이 든다고."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이 너무 진심으로 느껴져서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나이 든다고 절대 강해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점점 더 겁쟁이가 된다.




운전면허를 딴 지는 9년이 되었다.

남는게 시간이었던 학생 방학 시절 일찌감치 면허를 땄다. 대중교통으로 통학하는 내가 운전을 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면 곧 잘했다. 누구나 초보 시절을 겪지 않는가. 내가 남들보다 서투를 뿐이지 특별히 두려울 것도 겁날 것도 없었다. 운동 신경이 쥐뿔인 우리 엄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생활을 위해, 생업을 위해 하는 것이 운전이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면허증을 장롱에 잘 모셔둔 동안, 내 인맥의 두 다리를 건너면 교통사고 때문에 크게 다치는 케이스들이 몇몇 생겨났다. 물론 이런 케이스들은 기억에 강하게 남기 마련이라 확률로 따지면 매우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때로 끔찍이 일어나고 그 사고는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기보다는 운이 나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나일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자꾸만 내가 보고 들었던 소수의 운 나쁜 케이스들이 떠올랐다.


몸이 안 좋아졌다. 그럴 때면 심장이 불안하게 빨리 뛰었다. 한창 좋지 않을 때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롤러코스트를 탄 것 같았다. 그때는 감히 운전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 번 안 좋아진 몸은 완전히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증상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따금씩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빨리 뛰는 심장 덕에 초조함과 불안함이 엄습한다.



혼자 떠나는 여행

마지막으로 혼자 떠났던 여행은 4년 전 라오스였다. 그 당시에도 '나 혼자 여행 가는 게 오랜만이구나. 대학교 땐 참 많이 다녔는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내가 대학생 때와 완전히 달랐다고 느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생처음 가본 유럽에서 겁 없이 다녔던 20대 초반 어린 날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는 낯선 곳에 가거나 낯선 사람이 호의를 베풀어도, 술 취해 새벽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무섭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혼자서 국경 넘어 여행도 다니고, 차도 얻어 타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 가서 잠도 잘만 잤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랐다. 올해 혼자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다짐을 새해 목표에 끼어넣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혼자 여행을 갈 유인이 없으니까.  


막상 다짐은 했지만 혼자 여행이라는 것, 하고 싶기도 하고 하기 싫기도 했다. 해야만 하는 숙제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꼼수를 부렸다. 멀지 않은 제주도를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도 2박 3일 일정 중에 1박 2일만 혼자.



제주도에서 머리 올리기


'비행시간은 짧으니 혼자타도 무섭지 않겠지?'

'이 숙소 난방이 잘 안된다는데, 혼자있는 데 춥기까지 하면 잠이 안올거야.'

'혹시 잠이 안오면 어떡하지?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차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1층 독채라는데 밤에 무섭지 않을까? 누가 갑자기 노크라도 하면?'

'혼자 운전하는 건 처음인데, 렌트할 때 나 혼자가도 문제 없을까?'


4년 전 라오스 때는 생각도 안했던 작은 걱정들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비행기 안에서 심장 때문에 고생했던 지난 날의 기억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걱정이란 한번 사로잡히면 끝이다. 다 무시하고 겁없던 나로 돌아가자. 작은 용기를 내고 제주로 떠났다.



차를 렌트했다. 렌터카 업체 프로세스는 정말 빨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뒤에서 빵빵 거리는 바람에 내비도 못킨채 길을 나섰다.


제주시에서 애월로, 애월에서 구좌로, 성산으로, 표선으로 이동했다. 혼자 운전하는 것도, 빗길 운전도, 밤 운전도 처음이었지만 나름대로 해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냥 차에 타 내비찍고 따라 가다보면 도착하는 그 자유로움과 성취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튿날 아침에는 해돋이를 보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오름에 갔다. 쓰나미 현장처럼 바람이 불었다. 바람 때문에 피부가 아프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숨이 턱끝까지 찼다. 꽤 유명한 오름인 줄 알았는데, 그 큰 벌판같은 곳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정말 나 홀로였다. 그때 욕 한번 크게 외치고 올껄. 뒤늦게 후회했다. 날이 흐려서 해는 뜨지 않았다. 괜히 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는 길에는 아침 7시부터 예약 리스트를 받아주는 맛집에 웨이팅을 걸었다.



잠이 오지 않을까봐 걱정했던건 기우였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차치하고 다음 날 무얼 할지 검색을 좀 해보려는데도 잠이 쏟아졌다. 서울에서도 자다가 한번씩은 깨곤 했는데 이 날은 내가 계획했던 시간보다도 늦잠을 잤다. 그렇게 꿀잠을 잔게 나는 만족스러웠다.



최근 몇년간 친구들이 결혼도 하고 애도 낳다보니,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다. 여자들도 엄마가 되는게 처음엔 무섭고 서투르다는 것이다. 당연한건데도 어렸을때는 몰랐다. 알고보니 대부분의 여자들은 예정일 몇일 전까지도 애 낳는게 무서워서 전전긍긍했다. 애가 태어나면 애를 어떻게 다룰지 몰라 애랑 같이 울기도 했다.

나이가 든다고 모든일에 의연하고 능숙해 질 거란 건 착각이었다. 노인이 되도 그럴 것이다. 누구나 노인이 되는 건 처음겪는 일이니까 아마 엄청나게 서투를 것이다.


Y 선배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 나이 든다고 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겁쟁이, 걱정쟁이가 된다. 그러나 나는 많아지는 겁을 경계하려고 한다. 그럴 때 마다 내가 구태여 혼자 여행가기로 다짐하고 운전을 시도 했던 오늘의 작은 용기를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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