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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Jan 14. 2019

호치민 로컬 커피 체험

Day2. 따이를 따라서


긴 저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술 한 잔 하면서 나는 당부했다.

우리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아침 8시에 만나기로 했어.


역시나 그렇듯 G는 무슨 투어인지 별로 묻지도 않았다. 그는 겪어보기 전에는 그다지 사전 정보를 원하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다. 영화관에 갈 때도 예고편을 보고 가는 법이 없다. 심지어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다가 좀비 영화를 본 적도 있다. 어제 과음은 안 해서 다행스럽게도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데, 메신저를 다시 확인해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이 8시가 아닌 8시 반이었다.


뜻밖의 시간 여유가 생긴 우리는 골목을 배회했다. 골목에는 쌀국수와 이름 모를 베트남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벌써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제 술도 마셨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빈 속인데 삼십 분이란 시간 뜨끈한 Pho 한 그릇 하기에 완벽한 시간인 것 같았다.


약속 장소에서 50m 정도 떨어진 이름 모를 식당으로 들어갔다. 까막눈인 우리는 주문을 받으러 온 아저씨에게 나름 현지 발음을 흉내 내어 "fㅝ"라고 말하며 한 그릇 달라는 의미로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아저씨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쌀국수 한 그릇 40,000동 (약 2,000원)


식당 앞 쪽에서 육수를 끓이고 있었는데 국수도 금방 조리가 되는 것인지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나왔다. 고기가 가득 들어간 쌀국수와 신선한 초록 야채를 한가득 가져다줬다. 관대한 야채 양에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따로 내어준 숙주를 전부 집어넣고, 허브 향 강한 풀들도 도전 정신으로 좀 넣었다.

한국에서 먹는 쌀국수보다 확실히 면이 더 부드럽고 국물 맛은 훨씬 진했다. 나중에 회사의 베트남 친구에게 물어보니 베트남에서도 남쪽 호치민의 쌀국수는 국물이 더 진하다고 한다. 우리는 이 한 그릇을 치열하게 나눠 먹었다.


반 정도 먹었을 때쯤 함께 어줬 생 라임을 쭉 짜서 즙을 넣었더니, 시큼한 국물 맛이 나 더 중독성 있어졌다. 파프리카 맛일 줄 알았던 편 썰어 내어 준 노란 야채의 정체는 청양고추만큼이나 매운 고추였다. 순한 색깔을 띠고 있어서, 의심 없이 덥석 깨물었다가 당했다. 쌀국수 한 그릇은 금방 동이 났다.


Pho라고 주문해서 용케 쌀국수를 잘 받긴 했지만 벽에 붙어있는 메뉴에는 'Pho'라는 글씨가 없었다. 다만 두 메뉴가 큰 글자로 쓰여있었는데, 한 개는 3만 동, 다른 한 개는 4만 동이었다.

식당 아저씨는 우리에게 4만 동을 받았다. 3만 동짜와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곱빼기였을까? 너무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이래서 메뉴판 사진을 꼭 찍어와야 하는데. 아니, 다음에 베트남에 올 때는 인사말이라도 좀 배워 오기를 다짐한다.



베트남 로컬 커피숍, CàPhê Vợt

그는 자기를 Marco라고 소개했다. Marco는 냉장고 바지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우리보다도 더 여행자 같은 차림이었다. 우리에게 로컬 커피숍인 CàPhê Vợt를 소개해줄 참이었다.


연유를 넣은 아이스커피 15,000동 (약 750원)


실내엔 테이블이 두 개 밖에 없는 좁은 가게 앞에는 이미 호치민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게 뒤편에는 나이 지긋한 분이 쉴 새 없이 연유 뚜껑을 따고 있었다. 커피를 만드는 사람도 분주했다. 거대한 커피 필터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드립 커피를 추출하고 연유 위에 부었다.


우리는 셋 다 아이스 밀크 커피인 càphê sữa đá (càphê 는 커피, sữa는 우유, đá는 아이스)를 시켰다.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다람쥐 똥 커피라는 콘삭 커피를 사다 줘서, 베트남 커피가 유명한 것은 이 전에도 알기야 알았지만 베트남이 세계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국가인 줄은 몰랐다.


G와 나는 커피를 받아들고 비좁고 포장 주문을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찬 가게 안쪽 하나 남은 테이블에 가까스로 앉았다. Marco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M: 여기 앉을 거야?
G: 여기 아니면 어디 앉을 데가 있어?

Marco는 밖으로 나오라는 의미로 고갯짓을 했다. CàPhê Vợt 건너편에는 얼핏 폐허로 보이는 황량한 건물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정말 진풍경이었다. 건물은 탁 트인 베란다가 있어서 바깥이 훤히 내다 보이는 구조였다. 벽지 하나 제대로 안 발라져 있는 공사 중 같은 그곳에는 빨간 목욕탕 의자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자유롭게 펼쳐서 쭈그리고 앉았고, 그 의자 두 개를 겹쳐 테이블을 만들었다. 테이블엔 방금 전 카페에서 사 온 커피를 놓았다. 우리가 구경하는 사이 Marco는 어디선가 베트남식 샌드위치 반미 하나를 들고 왔다. "너흰 아침밥 먹었어? 난 아침을 안 먹고 와서 말이야." 


베트남 사람들도 이렇게 커피 마시는 일상이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이탈리아나 미국이나 각자 커피를 마시는 확고한 스타일이 있듯이, 베트남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다는 것도 재밌었다. 사실 다른 커피보다 두 배는 진한듯한 베트남 식 커피가 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는데, 연유 커피만은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진한 커피 향이 연유의 풍미를 높여주고 달달한 연유 덕에 다소 쓴 맛도 부드러워진다. 게다가 강한 카페인과 달달함의 각성 효과가 피곤할 때 특히 직빵이다.


Marco는 커피 원두를 주로 생산된다는 달랏 지방의 기후에서부터 베트남 사람들이 주로 마시는 연유 커피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그는 한국은 커피 습관이 어떤지 주로 어떻게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지도 물었다.

내가 집에서 머신 커피를 마신다고 하자, 자기를 포함해 베트남 사람들은 필터 커피를 마신다 필터 커피에 대한 은근한 우월감도 느껴졌다.


여긴 24시간 문 여는 곳이야. 일 년 동안 새해를 맞이하는 딱 10분만 문을 닫아. 불꽃놀이를 구경해야 되거든.
밤이 되면 저 길가 사이로 젊은 애들이 쭉 늘어서서 앉아서 커피를 마셔. 밤에 한번 와봐. 진풍경이라니까, 여기 나름 밤엔 힙한 장소야.


Ca Phe Vot 커피숍 건너편에 위치한 앉아 마실 수 있는 공간


Marco와 G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둘 다 긴장감 없는 성격이었다. 지적인 궁금증이 많았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직업이 둘 다 투자자였다.


그 둘은 베트남과 한국의 경제에 대해서, 호치민의 환경오염, 젊은이들의 임금, 대기업, 치솟는 도시 땅값에 대해 얘기했다. Marco는 베트남의 역사나 정치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한국의 역사를 잘 설명해 줄 수 있을까?라는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었다. 그는 불교였는데 1960년대 불교를 탄압하는 천주교 정권에 대항하여 분신하였다는 틱꽝둑 스님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베트남 불교 신자들은 한 달에 두 번 채식을 하는 채식의 날이 있거든, 그런 날이면 호치민의 가게에서도 채식 메뉴 가격을 꼭 올려 받는다니까. 성수기 가격인 셈이지. 그런 날은 식당에서 뭘 사 먹는 걸 조심해야 돼. 너희가 온 날은 채식의 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전통시장까지 걸어갔다.  


각종 야채, 과일, 생선과 정육점까지. 생동감 넘치는 시장 구경을 하다 보니 뭐라도 사고 싶었다. 숙소에 가서 까먹을 요량으로 망고를 사자고 제안했다.


M: Sweet한 망고를 원해 아니면 Sour한 망고를 원해?
나: 글쎄.. 망고면 달콤한 맛이 낫겠지?
M: 좋아. 그럼 이걸로 하자. 이 망고는 Sweet하고 Crunchy한 맛이야. 베트남 사람들은 망고는 보통 칠리 소금이랑 같이 먹는데 이 것처럼 말이야.


 Marco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잘라 놓은 망고와 소금이 있었다. 마치 순대를 포장할 때 나눠주는 작은 소금처럼, 딱 고춧가루를 살짝 섞은 분홍빛 소금이 들어있었다. 난 어렸을 때 딸기나 토마토에 소금을 쳐서 먹어봐서 그런지, 베트남 사람들이 단 맛 극대화를 위해 소금을 친다는 걸 금방 이해했다.



집에 와 맛본 이 망고는 이 전에는 먹어본 적 없는 맛이었다. 우선 말랑하지 않고 딱딱하다. 텍스처는 생밤 깨물어 먹는듯한 오독한 느낌, 아 이래서 crunchy 하다고 했구나. 말랑하지 않고 적당히 단단한 느낌이었다. 망고향은 나는데 묘하게 아오리 사과 맛이 났다.


과일 쇼핑까지 다 마치자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고, 내가 물었다.

너 베트남 이름이 뭐야?

Nguyen Tai (응위엔 따이). 따이. 그제야 그의 본명을 불렀다.

굿 바이 따이.


따이의 성인 Nguyen(응위엔)은 우리나라의 김 씨처럼 흔한 성이다. 가끔 업무적으로 베트남 사람들과 얘기할 때 많이 봐 온 기억이 있었다. 엔구옌이라고 해야할지, 뭐라고 발음할지 항상 의문이었지만. 직접 와서 봐보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흔했다. 체감 상 두 명 중 한 명은 응위엔인 것 같았다. 실제로는 베트남 인구의 40%가 응위엔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 3천8백만 명이나 응위엔이라고 하니 과연, 김 씨는 댈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 따이에게 우리의 사진들을 보내줬다. 베트남에 대해 너무 모르고 가서인지, 따이가 설명해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는 뇌리에 깊게 박혔다. 현지인 아니면 몰랐을 CàPhê Vợt의 별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다시 호치민에 가 그를 찾지 않는다면 평생 다시 못 볼 확률이 더 많겠지만 페이스북 친구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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