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서 배우는 삶의 나침반
어쩌면 이 세 가지가 마흔 하나를 살기 시작한 나를 이제라도 과거와 비교해 보다 풍성하고 온기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나침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음 한편에 이 나침반이 있을지 모르겠다.
‘평균’, ‘보편’, ’ 경쟁‘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지배하는 일상을 살다 보면 이 세 가지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당장이 급하고 마음은 쪼그라들었으며 외부 자극에 대응하고 방어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태평한 팔자 좋은 소리라며 그렇게 소통, 공감, 감사를 이상주의와 몽상가적인 마음가짐이라고 치부한 채 지내왔다.
뭔가 내 안이 비어있음을 알면서도, 분명 잘못되고 있고 비뚤어진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았는데,
내 아들을 통해 세상을 대하는 나 자신을 아주 작게나마 다르게 보는 연습을 시작 헸다.
난생처음 태교라고는 명목으로 뱃속에 있는 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게 생각난다.
대화체를 읽어주는 게 어찌나 부끄럽고 어렵던지..
떠듬떠듬 글을 읽는 내 모습을 스스로 우스꽝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아빠라는 존재로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시도했었다.
그런 시도에 아들은 우스꽝스럽지만 중저음으로 동화책을 읽는 아빠 목소리에 작은 발길질로 소통에 응해줬다.
세상에 태어난 아들의 사랑스러운 옹알이는 초보 아빠였던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기들과의 소통을 경험해 보지 않아 미숙했기에 머리로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때론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보채며 공감의 한계를 시험할 때면 아내와 나는 기겁하거나 허둥지둥 대기 일쑤였지만
그러면서도 그 작디작은 새 생명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크게 아프지 않고, 사랑스럽게 잘 웃어줬으며, 강력한 뱃심으로 있는 힘껏 자신의 욕구를 표현했다.
이런 것들은 바로 건강하다는 뜻이었기에 감사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때에도 나는 머리로는 모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치일 때면 쉽게 잊어버리고 ‘아차!’ 할 때가 아주 많았을 뿐..
이 세상 모든 것에 ‘당연함’이라는 건 없음을 자주 까먹었다. 아니 매번 까먹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까먹고, 반성하고, 기도하고, 또 반복하기를 되풀이하는 게 소중한 인격채를 키우는 부모들의 숙명인 듯하다.
어른들 말씀에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는데 부모 둘이 이 많은 역할을 분담을 하는데 부족함과 실수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 든다.
반성하고 자책하며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일상 일지라도 ’한 생명의 부모가 된 축복‘은 당연함이 아닌 진정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지 나 스스로도 매일 되짚어보게 한다.
어느덧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고, 나도 주니어아빠에서 아주 조금은 성장한 시니어 아빠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아이와의 소통이 아기 때보다 훨씬 수월해졌고 서로 간의 소통과 반응에 대한 공감력도 단단해졌다.
그리고 최소한 한 끼를 먹는 데에 감사함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와 같은 나이의 어떤 친구는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있음을 알려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소통과 공감 그리고 감사는 우리 어른들도 배우고 다듬고 계속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세 가지만 있다면 우리의 작은 울타리는 보다 튼튼해지고 따뜻한 온기를 가지게 될 거라고 믿으며
내일도 매일 반복되는 같은 하루지만 나와 다른 환경과 경험을 하게 될 아들에게 물어볼 것이다.
“오늘도 행복하고 소중한 하루 보냈어?”라고..
오늘 하루도 행복했다면 그건 당연하게도 당연함이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