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비슷한 어린 날들에게 바치는 이야기
25년 12월 어느 겨울날, 부산에 가야 했다더라. 현관문을 나서던 중 차키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부리나케 현관문 사이에 왼쪽 손을 걸쳐두고 오른손을 길게 뻗어 바닥에 있는 차키를 주웠다고 했다. 하늘도 무심하지, 그때 마침 거센 바람이 불어 무거운 철문이 아빠의 왼손을 철컹 내리쳤다고 했다. 걸쳐둔 손가락이 바람에 힘입은 철문에 짓눌려 상처가 났고 아팠지만, 그대로 부산에 다녀왔다고 했다.
다음 날, 집에 돌아왔을 때 왼손의 두 번째 손가락 상태가 심상치 않았고, 살고 있는 전라북도의 작은 도시에서 나름 큰 병원에 갔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염증 상태가 심각하여 당장 입원을 권유했고, 아빠는 그렇게 입원을 하게 됐다. '금방 치료되겠지' 하는 마음이었을 테다. 어떻게 손가락이 그 지경인데 부산에 다녀올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원 후, 아빠의 손가락은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다. 염증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고, 뼈까지 녹는 상태가 되었다. 가장 센 항생제를 써도 아빠의 손가락은 낫지 않았다. 아빠 몸에 항생제 내성균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항생제 내성균.. 그런 게 왜 생기는 걸까 궁금했다. 평소 궁금한 게 생기면 해소될 때까지 파헤치는 편이지만, 찾아보지 않았다.
아빠 평생의 식습관과 생활루틴을 알기 때문에 그런 나쁜 게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0대 때부터 피웠다는 담배, 매일같이 들이켰던 술, 술로 인해 이성을 잃을 때면 막무가내로 휘두르던 몸. "운동"이나 "비타민"과 같은 건강한 단어는 아빠 인생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40대 때는 당뇨, 50대 때는 위암을 앓았던 아빠. 아빠의 몸은 젊은 날 방심했던 벌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입원을 한 지 2주가 넘어갈 무렵, 아빠는 나에게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잘라야겠다고 했다. 손가락 뼈를 지지하는 심을 박고 나서부터 매일 차오르는 고름을 간호사들이 죽죽 짜낼 때마다 눈물이 날 지경으로 아프다고 했다. 그 시간이 오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손가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어차피 살린다고 해도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 그 기능을 못할 거라서, 그냥 잘라버려야겠다고 말했다. 손가락을 그냥 잘라버린다니, 나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는 뭐라더냐"라고 물었다. 의사는 최대한 손가락을 자르지 않고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라고 말했다더라. 절단은 최후의 보루이니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더라. 그럼에도 아빠는 너무 아파서 그냥 콱 잘라달라고 했다고 한다. 내 가슴이 꽉 막히는 지점이었다.
손가락을 자르는 일마저도 아빠는 쿨할 수 있구나. 쿨하게 엄마와 이혼도 하고, 대책 없이 차도 팔아먹고. 아빠는 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구나.
아파서 그 손가락을 자르고 나면 그다음은? 운전으로 벌어먹고 사시는 양반이 일할 때 어떤 불편이 있을지 생각은 해봤는지, 혼자 살면서 일상에서 오는 불편은 어떻게 감당할 건지, 멀어진 사이지만 나와 두 오빠들은 어떤 심정일지 염두에 두긴 했었는지. 그런 건 아빠 안중에 하나도 없구나 싶어, 나는 더 큰 대학병원을 가보라고 윽박질렀다. 아빠는 왜 허구한 날 안 좋은 일만 내게 알려서, 나 혼자 이 무거운 감정을 감당하게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났다. 당신만 너무 쿨해서. 편해 보여서.
그리고 새해가 밝았다. 밝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내 마음속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아빠의 손가락이 나를 참 아프게 했다. 자기 확신과 고집이 센 아빠가 결국 손가락을 자를 거라는 결말을 처음부터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다음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마다 기도를 했다. "주님, 아빠의 손가락을 자르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회복시켜 주세요. 염증이 사라지게 해 주시고, 그의 고집을 녹여주세요."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났다. 짜증이 났다. 화가 났다. 또다시 눈물이 났다. 반복이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도 10일이 지날 무렵, 고모가 연락을 해왔다. "너네 아빠 손가락 아파서 맨날 운단다, 보통 일이 아니야. 다음 주에 손가락 절단 수술 날을 잡았대. 병원을 좀 가보던지 하라고 알려주는 거야."
고모는 항상 이런 식이다. 엄마와 우리 삼 남매가 아빠로부터 어떤 20년, 30년을 보냈는지는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아빠가 나에게 어떤 두려움과 공허와 슬픔을 주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아빠가 아플 때마다 연락을 해온다. 1년 365일 연락을 한 번도 안 하다가 아빠가 아플 때만.
"그래도 자식이니까 부모하고 연을 끊을 수는 없는 거"라고, 내 어깨에 그 철문보다도 무거운 짐을 얹어주려고 때마다 기꺼이 나를 찾아온다.
"네 고모, 알겠어요" 하는 것도 왜인지 넌더리가 나서 "고모는 저희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지 못하시면서 왜 매번 이렇게 제게 부담을 주시는 거냐"며 맞받아쳤다. 고모는 손님이 왔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손님이 왔다니, 식당을 운영하시는 건가. 나는 고모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고모는 다시 연락해 오지 않았다.
고모 입장을 이해한다. 마음이 많이 아플 것이다. 60살 넘은 오빠가 홀아비가 되어 아파도 돌봐줄 사람 하나 없다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을 테다. 나도 오빠가 둘이나 있기에 이해한다.
다만 모든 게 버거웠을 뿐. 나 역시 지켜야 하는 가정이 있기에, 친정 일로 슬픔에 빠져 남편과의 관계에 지장을 입고 싶지도 않았으며, 버거운 내 마음도 더 이상 혼자 감당하기 싫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