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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탤미 Nov 11. 2021

0.65cm

0.65cm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명령에 이끌리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몇 명이나 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수백만 개의 무리들. 그들 모두 달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앞을 향해 전진한다.

머리는 무겁게 꼬리는 가볍게 있는 힘껏 앞을 향해 헤엄친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투쟁이자 달리기다. 내가 느끼는 모든 신경이 바스러질 것 같은 전력질주를 쉬지 않는다.

그러다 정말 바스러지는 존재들도 있다. 존재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들은 도태되고 다시 한번 앞을 향해 전진한다. 순간 하달된 명령에서 처음 관문을 맞이한다. 드디어 진입했다 감지한 순간, 갑자기 느낄 수 있는 모든 표면들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것들이 녹아내린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만나야 한다. 나는 존재해야 한다. 그 명령만이 진동처럼 나를 질주하게 한다. 얼마큼 견뎠을까. 얼마큼 달렸을까. 어느 순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만큼 숨 쉴 수 없는 공간에 들어온다. 답답하다. 앞으로, 앞으로 가야 하는데 몸통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나만큼이나 묶여있다. 나아갈 재간을 찾지 못해 허둥거린다. 그렇지만 가야 한다.


단 한 가지 명령, 도달해야만 하는 의무, 존재의 이유를 찾아 버둥거리고 발악하며 견디고 전진한다.

그렇게 한 점을 향해 질주하는 흐름 속에 잠시 쉴 틈을 찾았다. 수백 개로 좁혀진 많은 무리들이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힘을 비축한다. 기다리고 숨을 돌리는 사이 얼마 못가 먹히어 소멸되는 것들도 있다. 존재하지 못한 것들은 사그라져 가는 것이다. 얼마만큼 흘렀을지 모를 시간이 지나간다.


어느 순간 서서히 등장하는 무언의 형체. 간신히 살아남은 무리들, 드디어 뚫어야 할 마지막 종착역을 만난 것이다. 존재되기 위해 진입해야 한다. 탈진상태에도 비축해둔 마지막 힘을 낸다. 안착할 공간을 찾는다. 전력질주. 안간힘. 잔인한 전투의 끝이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달.했.다.


-


“착상 잘 됐네요, 여기 아기집 잘 만들어졌고요. <0.65cm> 정도 돼 보이네요. 심장소리는 2주 뒤에 들을 수 있습니다. 임신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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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가 되기 위한 기적의 존재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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