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크리스마스를 추억하며
5살 때였다. 산타 할아버지가 아직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가장 큰 기대감을 갖게 해주는 이벤트들 중 하나였다.(어린이날 다음으로) 평소에는 부모님에게 기대하지 못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을 수 있었으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산타 할아버지가 무엇을 선물해 주실까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나는 입 밖으로 내가 무엇을 갖고 싶은지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도 몰랐던 것 같다. 다만 다른 친구들처럼 그들이 자랑하는 멋들어진 인형 정도를 받을 수 있을 거란 환상을 품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그래서 산타할아버지는 나도 알지 못하는 내 마음속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알아봐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 한편에는 어린 여자 아이에게 인기 있던 미미나 쥬쥬 인형과 같은 것을 선물해 주시려나 하고 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기대감과 설렘을 품고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옆에 바스락 거리는 검은 물체가 우두커니 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볼품없이 하나로 질끈 묶은 검은 봉지였다. 슈퍼 가면 먹을 것 담으라고 주는 봉 다 리. 그 위에는 하얀색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어른 글씨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과 함께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OO이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잘 지내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 선물 안에는 슈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자들이 들어있었다. 양파*, 버터*, 오예* 등.
내가 말했다.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가셨어. 근데 과자네...”
엄마는 겸연쩍은 미소로 입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산타할아버지가 네가 워낙 과자를 좋아해서 두고 가셨나 봐.”
나는 왜 그랬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실망감을 감추고 괜찮은 척을 해 보였다.
"우와! 맛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사다 주셨네!"
하지만 속으로는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과자는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5살 난 아이에게 실망스러운 감정이 몰려들었다. 그럴듯한 선물을 받지 못했기 때문도 있지만 인간보다 초월적인 존재라 믿었던 산타 할아버지가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구나 라는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산타할아버지는 내가 진짜 무엇이 갖고 싶은지 모르셨나 보다.
그 이후로 이 세상에 산타할아버지가 없다고 알게 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7살 때 집이 꽤 커 보이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친구의 집은 나이 먹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화려했는데, 침실은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하얀 레이스로 장식해 놓은 침대가 있었고, 방 안에는 온갖 인형들로 진열되어 있었다. 미미나 쥬쥬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 물 건너온 바비인형이 수두룩 했다. 7살 여자아이에게 눈 돌아갈만한 인형들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이 인형 만져 봐도 돼? 너무 예쁘다.”
(바비 인형이 눈독이 갔다.)
친구는 말했다.
“이거 작년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해 주고 가신 거야. (귓속말로 소곤소곤) 근데 사실 우리 부모님이 주신 거야. 산타할아버지는 없는 거 알지? 부모님들이 거짓말하는 거잖아.”
나는 그때까지도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단 그 한마디에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는 우리 부모님으로 치환되었고, 왜 그랬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적지 않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친구에게 의연해 보이기 위해 “응 알아. 부모님이지.”라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동시에 5살 때 받은 검은 봉지가 생각났다. 슈퍼에서 파는 과자들로 쌓여있는 과자 뭉치들. 그건 선물 살 여력이 없어 자기 딸에게 과자선물 박스도 아닌 스낵류의 과자들 5~6개를 골랐던 부모님의 성의였다.
검은 봉지를 받던 당시 우리 집은 부엌과 안방이 딸린 반지하 단칸방에 살았다. 우리 4식구는 한 방에서 이불을 펴놓고 자곤 했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았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원래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왜냐면 옆집 친구도,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새댁 언니네도 우리랑 비슷하게 살았으니까. 가끔 윗집 2층에 사는 주인아주머니 딸이랑 싸울 때면 엄마가 절대 그래선 안된다고 혼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그런데 그 검은 봉지 선물 이후로는 어쩐지 내 마음에 조금은 ‘아린 감정’이 남게 됐다. 우리 부모님이 그 선물을 하면서 나에게 딱히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엄마 아빠는 무드가 있는 분들도 아니고, 센스가 있는 분들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열심히 돈을 벌고 열심히 아이들 밥 안 굶기게 노력하시는 평범한 분들이셨다. 그래서 아마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여보,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선물을 줘야 하지 않을까? 뭐 주지?”
“그냥 이번에는 대충 넘기고 내년에 사정 좀 나아지면 제대로 된 선물 해주지 뭐. OO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만 좀 사다주자.”
역시나 나의 상상도 무드가 없다. 그렇지만 정말 그러셨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기억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행복해 보이는 크리스마스때 이런 추억도 있다고. 우리 부모님은 아무것도 주지 못하셨을 수도 있는데 내가 제일 즐겨하던 과자를 주셔서 그 검정 봉지를 추억할 수 있다고.
지금은 너무나 풍족해서 먹을 것이나 선물은 내 돈으로 충분히 살수도 누릴 수도 있게 되었지만, 내 기억 어딘가 크리스마스는 산타할아버지의 검은 봉지로 남아있어서 조금은 아리고, 서글프고, 따뜻하다.
추억 속 산타 할아버지, 메리 크리스마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