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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탤미 Nov 16. 2020

위로

고 2 쨍한 여름날이었다. 교실 밖으로 친구들과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하얀 실내화에 하얀 양말, 하얀 운동복까지 모든 것이 하얘서 우스꽝스럽기로 소문난 고등학교 체육복 차림으로. 막 운동장에 나가려는 찰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탤미야! 혹시 소식 들었어? 욱이 어머님 돌아가셨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나의 머릿속에는 2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첫 번째는 왜 내가 첫 번째로 알지 못했는지, 두 번째는 어머님이 이렇게나 위독한데 인지하지 못했을까 였다.

철없게도 친한 친구 어머니의 부고 소식으로 그녀를 향한 애도보다 내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치기 어린 어리광과, 초등학교 때부터 죽마고우라 떠들고 다녔던 친구 어머니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무신경함이 몹시나 부끄러웠다.


상주는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동네 친구였기에 욱이 어머니와 안면이 있던 나의 엄마도 장례식장에 동행했고 친구는 검은색 옷을 입고 빠알간 눈과 함께 나와 나의 엄마를 맞이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주머니의 영정사진과 쓸쓸히 누워있는 하얀 꽃들, 어떻게 인사하고 목례를 해야 할지 모르는 당황스러움이 애도의 마음보다 앞섰을 만큼 나는 경험이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조문과 목례를 쭈뼛거리며 한 후 중학교 친구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친구는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그녀의 눈물이 어색했고, 나에게 보이지 않던 눈물을 다른 친구들에게 보이는 친구에게 속상했던 것 같다. 누구보다 그녀를 위로해야 할 나였음에도 나는 엉뚱한 말을 했다.


“혜영이는 어딨어? 혜영이는 안 왔어? 응?”


나에게 부고 소식을 알려줬던 혜영이라는 친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 친구들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빛으로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묻고 있었다. 내 안에는 애도의 마음과 동시에 편협한 질투심, 속 좁은 옹졸함이 자리해 무엇이 중한지 모를 말을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누군가를 온전히 위로하기에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았다.


그저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고 속상하고 어색했다.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 가는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일까.




친구의 집은 바로 옆 아파트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표현이 그녀와 나의 집 사이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투닥거리고 싸우기를 반복했던 그녀와의 사이는 꽤나 끈끈했고, 제일 친한 친구 하면 떠오르는 녀석이 욱이였다. 그래서 욱이네 어머니도 딸의 친구들 중 나의 이름을 가장 많이 들었을 거라 의심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친구 어머니의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 얼마나 악화된 상태였는지 잘 알지 못했다. 자칭 타칭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본인도 아닌 다른 친구에게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도 어쩌면 그녀에게 나는 마음 편히 자기 마음을 터놓은 듬직한 친구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여자 아이는 어느덧 30대를 넘은 어른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위로의 자리는 편치 않다.

한 번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의 장례식장을 홀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는 사이가 좀 틀어진 다음이라 더욱 어색했을 수도 있다. 내가 갔을 때 친구는 많이 울고 있었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리로 생각나서 하는 말을 한 게 아니라 입에서 만들어진 말을 뱃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가 되고 난 후에 이렇게 보게 돼서 더 맘이 그렇네, 어머님 암이 어느 정도 괜찮아 지신 줄 알았어. 그래도 네가 어머니 병을 알고 난 후부터 어머니 옆에서 지낼 수 있었다면 다행인 거 같아."


그동안 어머니의 병간호를 어떻게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필요하지 않은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친구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눈빛만 내보일 뿐이었다.


당시를 생각해 보면, 아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도통 눈물 흘리는 친구 앞에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온건한 위로를 줄 수 없었던 건 나 역시 제대로 위로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재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죽음의 사건에는 비할바 못되지만 나에게도 혹독한 해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나의 건강은 하락세를 달리고 있었다. 먹는 것이 곤욕이 되었을 때,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걱정은 하지만 공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공감받지 못한 어색한 위로는 내가 나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 자체를 그만두게 했다. 어느 날은 교회에서 단에 올라가 찬양을 해야 하는데 올라가기 직전에 먹은 물이 체했다. 배에서는 꿀럭거리는 물소리가 나고, 가슴 아래쪽 명치는 돌멩이가 들어간 듯 꽉 막혀서 나를 옥죄었다.

강단에서 찬양 중이었기에 위치를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었다. 당장 내려가 소화가 되도록 걸어 다니고 싶었다.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도 싶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눈물이 났다. 찬란해야 할 20여 분간의 시간이 고통으로 변했다. 모든 예배를 마친 후 내가 괴로워 보였던 친한 언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 많이 안 좋아?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나는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것 같다.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다가 엄마가 오면 우는 것처럼 그 말을 듣자마자 스위치가 켜진 듯 눈물을 쏟아냈다.


"너무 지겨워요. 정말... 흑흑"


나는 어깨까지 흔들면서 울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언니는 나를 꼭 안아주면서 본인도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명치를 꾹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풀리면서 편안해졌고, 제대로 호흡하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는 나를 안은 상태로 몇 분간 있었던 것 같다. 그 전에도 그렇지만 이후로 나는 언니에게 너무 고마웠다. 아마 어떤 사람보다 내 건강을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해 주고, 안아주고 울어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위로의 방법을 알려준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 이후로도 그녀는 내가 강단에 남아 혼자 기도할 때 옆에 앉아있었고, 안아주었고, 같이 기도해 주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같이 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능하다면 포옹해주는 것. 어쩌면 말로 들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이 행동들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위로는 받아본 사람만이 줄 수 있다. 그러니 사랑받았으면 사랑을 주고, 위로받았으면 위로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조금은 온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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