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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탤미 Oct 26. 2020

내 성격이 어때서!

어렸을 적부터 엄마는 나에게 "네 성격을 고쳐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셨다.

한마디로 성격이 더러우니까 앞으로 세상 편하게 살려면 너의 성질을 죽여야 한다는 부모로서 내린 걱정 어린 조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잔소리 같은 조언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나스럽게 살아가는데 주저함이 없을 만큼 당시의 나는 철이 없었다. 이제는 훌쩍 30줄이 넘어가면서 엄마는 다시 한번 나의 지랄 맞은 성격에 제재를 가하고 계셨다.


"아무개야, 너는 신경이 너무 예민해, 그럼 너한테도 진짜 안 좋아.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내가 한창 속이 안 좋아서 힘들어할 때 나를 보며 하신 엄마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조언을 매일 아침 밥상머리에 마주할 때면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성질 더러운 것 알고 있고, 까탈스럽고 예민한 것도 인정하고 있음에도 이 성격을 나조차 어찌할 수 없는데 자꾸 어떻게 해보라는 엄마의 조언은 나의 위를 더욱 아프게 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내가 "엄마, 내 위가 안 좋은 게 내 성격 탓이면, 이 세상의 모든 예민한 사람들은 다 나처럼 아프게? 아니잖아 근데 왜 자꾸 바꿀 수도 없는 내 성질을 바꾸라고 하는 거야."라고 항변하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이봐, 또 예민하게 반응하네, 뭔 말을 못 해. 네가 이러니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니"라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신다. 그러면 진짜 피해자인 나는 아침밥이 소화가 안되고 또 엄마에게 짜증 낸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그런 기분으로 출근한다. 그러다 내 성질머리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었다. 정말 성격이 지랄 맞은 걸까.




나의 성질머리를 이해하고자 하면 나를 낳아주신 우리 부모님의 성격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바는 "너는 네 아버지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성격이라 함은 분명한 장점과 단점이 꽤나 확연히 구분되는 분이시다. 장점은 호탕하고 밝은 성격 덕에 동년배 분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 넉살 좋게 친분을 쌓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는 점. 한마디로 친화력이 좋아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데 능숙하다. 물론 이런 큰 장점의 이면에는 가릴 수 없는 넓고 굵은 단점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가장 크게 주목할만한 성격적 특징은 다혈질에 감정의 높낮음이 크다는 데 있다.

냄비같이 갑자기 끌어올라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실 때가 종종 있는데, 가령 한 두 번 설명했을 때 잘 이해 못하면 답답하다 생각하는지 언성을 높이고 버럭 짜증을 내곤 하신다. 무던한 사람에게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화, 분노가 내제해 있어 쉽사리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강한 핏줄을 따라 흐르는 나의 성격은 이를 이어받았다. 개인의 존재를 인식하기 힘든 갓난아이 시절부터 남다른 까칠함을 내비치곤 했으니 말이다. 엄마는 다른 임산부에 비해 모유가 잘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오빠는 지독하리 만치 나오지 않은 젖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고 한다. 반면 나는 달랐다. 젖을 빨다가 모유가 쉽게 나오지 않자 엄마의 가슴을 때리며 획 고개를 돌렸다. 결국 오빠는 모유로 나는 분유로 키워졌다. 모유 사건을 통해 태생적인 기질 자체가 인내심이 약하고 성미가 급하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은가.


이뿐만이 아니다. 나의 예민함은 몸이 먼저 알아보았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갓 넘어갔을 때였다. 한국에서 교육과정을 받은 이들은 알다시피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수업시간이 다르다. 갓 중학교에 입학해 10분씩 길어진 수업시간과 오후까지 계속된 스케줄은 14살 소녀에게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오후 수업 이후부터 배에 가스가 차더니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교복 치마가 복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중생의 창피함도 아랑곳 않고, 교복 치마의 허리 자크를 억척스럽게 풀어헤치곤 했다. 그러다 모든 수업이 끝나는 종이 올리면 집으로 냅다 뛰어 화장실에 쳐들어 갔다. 큰 볼일을 볼 것처럼 헐레벌떡 들어가지만 나오는 건 '푸쉬쉬'하는 가스 빠지는 소리뿐이어서 허망한 날이 2주 넘게 계속됐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바뀐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업 환경이 나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그것이 몸의 명현반응처럼 적응기간 동안 계속됐다.


이런 경험으로 보아 나의 예민한 성미는 기질적인 것이 다분한 것 아닌가.

엄마가 나에게 발언한 "네 성격을 고쳐야 네 건강도 괜찮아진다"는 발언을 수긍해야 할까? 정말 모르겠다. 성격이 예민해서 내 위가 안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위와 뇌는 직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많은 이들이 말하곤 하니까. 그러나 내 성격만 고치면 건강 회복도 만사형통이라는 발언은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나처럼 성격이 예민하고 섬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건강이 안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격을 고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구심이 가장 크다.

기질적이고 탯줄부터 예민했던 나의 성격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정도 개선하고 사회성을 가지고 발전시킬 수는 있지만 나도 모르게 들어오는 외부의 환경에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이 내 몸을 변화시키는 것을 막을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귀가 닳게 성격을 고쳐야 한다는 엄마의 발언은 나에게 스트레스만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나의 이런 고민들을 지인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한 명이 이렇게 말하더라. " 스트레스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오히려 적당한 스트레스를 이용해 삶의 활력을 찾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의사도 그렇고 스트레스는 마땅히 가지면 안 되고 차단해야 하는 암세포같이 생각했는데, 오히려 적당한 스트레스가 내 삶에 좋은 영향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은 꽤나 신선했다. 더불어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길 "너는 생각보다 예민하지 않다는 "이다. 우리 가족들에게 내비치는 모습과 가족 아닌 지인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또한 달랐으니 어쩌면 나의 성격과 스트레스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불어 다행스러운 건 그렇게 엄마와 한바탕 한 이후로 당신은 나에게 "성격을 고치라"는 발언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생각의 전환도 그렇고, 내 성격 개조 발언 또한 금기시되어 지금은 엄마와의 논쟁 없이 평온한 일상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부모님과 언쟁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성격 발언은 다시금 만만한 반찬처럼 아침밥상의 메뉴로 출현할 수도 있지만, 그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랄 뿐이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불안하고 근심 많은 상황 안에 함몰되지 않기를. 통제할 수 없는 환경으로부터 신경 쓰는 스스로를 향해 한 줌의 위로를 선물해 주길. 그리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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