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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댕 May 06. 2023

입하

왜 쓰겠다고 한 거지?

[입하]

2023.05.06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곱 번째 절기


적당히 간 진갈색 원두 위로 김이 나는 물이 얇고 길게 떨어지며 촉촉이 적신다. 원두가 보글보글 연갈색 거품을 일면서 위로 부풀어 오른다. 드리퍼 아래의 투명한 유리 드립 서버로 커피가 쪼르륵 떨어진다. 사실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원두를 갈 때, 그리고 내릴 때 냄새를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내려 마시고 있다.


창밖으로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있다.

마치 원두가 물을 머금은 것처럼 베란다 화단의 마른 흙도 비를 맞아 진갈색으로 변했다. 어린이날과 주말이 연이어 붙어있는 오늘은 상당히 많은 비가 내릴 거라 예고되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다행히 부슬부슬 정도로만 내리고 있다. 엊그제엔 공기가 습기를 가득 먹고 있어서 그랬는지 반팔을 입었음에도 좀만 걸어도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벌써 여름이 왔나 겁을 잔뜩 먹었는데, 비가 내리고 나니 집 안에서 로브를 걸쳐야 할 만큼 다시 싸늘해졌다. 아직도 침대 위를 차지하고 있는 전기장판은 창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보리가 익을 무렵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 ‘맥추’라고도 한다.

일곱 번째 절기지만 글을 쓰는 건 ‘입하‘가 다섯 번째다. 앞의 ‘입춘’과 ‘우수‘ 두 절기를 빼먹었기 때문인데, 오늘 글을 쓰기 위해 아이패드를 켜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걸 왜 쓰겠다고 했지?

잡지에 연재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귀찮고 번거롭게만 느껴지는 이 절기의 기록을 왜 쓰겠다고 한 거지? 쓸 말도 없는데. 그리하여 왜 쓰겠다고 했는지 다짐을 기록한 ‘프롤로그‘편을 돌아가 읽어보았다.

https://brunch.co.kr/@greatlife/168


아니 벌써 시리즈를 끝내고 싶다.


그렇다. ‘아니 벌써 5월이 되었다고?‘라는 말을 5월 1일에 달력을 넘길 때부터 내뱉은 후였다. 여전히 ‘아니 벌써‘ 시리즈는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는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절기 기록은 ‘경칩’인 3월 6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입하‘인 오늘까지 딱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의 절기가 지나갔지만, 날짜로는 2개월, 대략 60일 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요즘 들어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뭐, 요즘은 아니고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그랬다. 새삼스럽게. 그런데, 경칩 이후로 고작 2개월 밖에 안 지났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야, 아직 2개월밖에 안 지났잖아?

우연히 추천으로 본 인스타 글귀에서 그런 말이 있었다. (나는 ‘저장‘을 눌렀는데 찾아보니 없어서 대충 기억나는 대로 써 보겠다.) 인생을 한 권의 책이라 생각하지 말고, 시리즈물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힘드니까, 한 번씩 끊고 가라는 의미였다.

그래. ‘벌써’가 아니라 ‘아직‘이다.

아직,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벌써’ 시리즈는 이미 끝이 났다고.

지금은 ’아직 시리즈‘가 연재 중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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