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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댕 Nov 12. 2020

[그빵사]11. 식기세척기 예찬론

꼭 들이셔야 합니다.

[그냥 빵을 사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초보 홈 베이커의 빵 만들며 드는 생각들




평소에도 설거지는 싫어하긴 했지만 식기세척기는 굳이 필요할까 싶었다.


그동안은 주말 아침에 가족 네 명이서 함께 밥을 먹는 날만 빼놓고는 내가 먹은 식기만 치우면 되니까 딱히 생각을 못했는데, 올해 들어 아빠의 은퇴 + 나는 캥거루 프리랜서 + 언니의 재택근무 + 가정주부인 엄마 + 코로나로 인해 밖을 못 나감 의 콤보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일이 확 늘어났다. 못해도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는 4개씩 기본으로 나왔고 반찬 그릇에 냄비까지 더하면...(이하 생략)


설거지 담당이었던 나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할 때쯤 아빠께서 식기세척기를 사자는 제안을 하셨다. 엄마께선 그저 본인이하면 된다고, 뭐 그렇게 비싼 걸 사냐고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나의 툴툴거림이 점점 심해지자 결국엔 동의를 하셨다.


그렇게 들어오게 된 12인용 식기세척기. 처음엔 작은 6인용을 살 예정이었지만 안 그래도 가득 찬 주방에 둘 곳이 없어서 매립형으로 하는 바람에 더 큰 걸 사게 되었다. 공사를 하는 걸 방 안에서 숨죽여 지켜보면서 내가 사드리는 것도 아닌데 이거 일이 너무 커진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한 번 사용하고 나니 이게 웬걸?


'이걸 왜 모르고 살았을까?'


신세계가 펼쳐졌다.


기름지고 지저분했던 그릇이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닦이는 게 아닌가. 사람 손 보다 깨끗해! 건조기능까지 있어서 싱크대 옆에 물기 똑똑 흐르는 그릇을 두지 않고 그때그때 정리해 놓을 수 있어서 주방이 훨씬 깨끗해졌다. 의류 건조기 살 때도 이런 새로운 세상이 없더니 식기세척기는 그보다 한 단계 레벨업 된 세상에 와 있는 듯했다. 너무 좋아하는 나와 언니에게 부모님은 '누가 보면 맨날 설거지시키는 줄 알겠다며' 웃으며 말씀하셨다. (맨날 한 거 맞는..)


 우리 가정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식기세척기는 홈베이킹을 하면서 그 쓸모를 200% 발휘했다.


한 번 빵을 하면 온갖 재료를 담았던 그릇에서부터 머랭 친 보울, 핸드믹서 날, 실리콘 주걱까지 설거지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특히나 버터를 녹이거나 설탕을 섞은 그릇들이 많아서 손으로 설거지를 할 경우엔 그릇에 버터가 남아 미끌 거려 난이도가 높았다. 고작 몇 개의 빵을 만드려고 설거지 거리는 산더미처럼 나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듯한 느낌이었다.


빵을 다 만들고 식기세척기 안에 미끌거리는 그릇들을 차곡차곡 넣으면 아래 위로 나뉜 내부에 아래층이 식기들로 가득 찬다. 상 하단 분리 세척기 가능해서 하단만 채워서 '간편'으로 돌리면 딱 29분이 걸리는 데 끝나고 나면 '뾱!'하고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고 수증기가 빠진다. (꼭 자동문열림 기능이 있는 제품을 추천한다.) 열기가 식은 뒤에 그릇을 꺼내면 버터를 담았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원래 있던 제자리에 정리해놓으면 언제 베이킹을 했냐는 듯이 주방은 깔끔해진다.


아, 정말 진짜 진짜 진짜 대박이라니깐요.




생각해보면 유독 집안일에 관해선 발전이 더딘 것 같다. 특히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연예인들조차도 식기세척기나 건조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진짜 안 쓰는 걸까, 가사 도우미가 다 해주는 건가, 아님 있는데 쓰는 모습을 안 보여주는 걸까? 저렇게 돈 많은 연예인들도 안 쓰는데 평범한 가정에선 사치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엄마께서도 본인이 직접 하면 된다고 하시는 분이셨기에 신문물(?)이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집에서 살림을 도와드리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이게 가능하다고?' 하라면 할 수는 있겠... 아니 못해. 난 못해. 절대 못해.

자취를 해 본 적이 있지만 1인 살림과 4인 살림은 차원이 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득 찬 세탁기를 보면서 한숨이 푹푹 나온 적이 있었다. 매일매일 옷을 갈아입는 언니에게 잔소리를 했더니 언니가 의류 건조기를 사주는 게 아닌가! (멋져!!) 내가 딱 귀찮아하는 일을 건조기가 대신해주니 빨래를 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건조기라는 신문물이 들어온 이후로 무선청소기는 엄마께서 구매를 했고, 이제 식기세척기까지 있으니 집안일 어벤저스가 탄생했다. (어디 화장실 청소하는 기계는 안 나오나?)


부끄럽지만 나는 내가 해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괜찮다고 하는 엄마의 말에 진짜 괜찮은 줄 알았다.

해보니 알았다. 이건 괜찮을 수 없는 문제라고.


없어도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사보니 달랐다. 이젠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누가 집안일이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기 돌리면 끝이라고 했던가.

내가 하면 되는 일을 가전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대체해도 집안일은 산더미이다.


이런 사실들을 몰랐던 건 집안일이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탄생한 무관심에서 피어난 무지함이었다.

혹은 알면서도 귀찮으니까 모르는 척, 시키지 않으니까 말하지 않으니까 괜찮겠지하고 살았던 지난날을 반성해본다.




나의 살림 좌우명 :

살림은 템빨이요, 노동력은 곧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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