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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한솔 Mar 10. 2021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 한양도성의 축약판, 입문자들에게 적극 추천!

 한양도성 구간의 축약판,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의 방문 후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방문 목적

 

 한양도성에 아직 오르지 않은 분들은 한양도성 관련 박물관 및 전시관을 먼저 방문하는 것 좋다고 생각한다. 배경지식을 알고 한양도성을 오르면 더욱 흥미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관련된 기관으로는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한양도성유적전시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규모가 아담하면서도 한양도성을 축약해 놓은 듯한 곳이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여서 이곳을 가장 먼저 가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작가의 방문 후기를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해설 프로그램 예약 및 신청


 한양도성을 순성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사실이다.


 전시•안내센터에 그냥 방문하여 관람해도 물론 좋다.  하지만, 기왕이면 해설사님의 해설을 듣는다면 보다 더 유익하고 한양도성에 대해 더 알아가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해설 프로그램을 예약 신청했다.



 예약은 서울특별시 공공서비스 예약 홈페이지에서 “옛 서울시장 공관의 역사와 한양도성의 의미”라는 제목을 찾아 신청하면 된다(검색창에서 “혜화동”이라고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https://yeyak.seoul.go.kr/main.web



운영 시간 및 장소


 월요일은 휴관일이니, 그 외 요일에 오전 9시 30분~17시 30분 사이에 와서 관람하면 된다.


 다만, 현재 코로나19 상황으로 건물 및 카페 개방 여부와 해설 프로그램 일정(현재 제한적 운영 중)이, 변동 가능하니 방문 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 문의 : 02-766-8520~1

https://seoulcitywall.seoul.go.kr


 위치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인근에 있다.



혜화문 경유 방문


 센터를 방문하기 전, 바로 앞에 위치한 혜화문을 먼저 찾았다.    

 백악 구간의 마지막 지점이자 낙산 구간의 시작 지점인 혜화문이라, 올해만 벌써 3번째로 방문했다.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듯한 인상을 주는 혜화문. 안내센터로 가기 위해 문을 통과한 뒤 우측의 계단 위로 올라갔다.



성벽 위는 오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분 좋은 감상을 하며 조금만 걸어가면 건너편의 안내센터를 볼 수가 있다.

 

계단으로 내려오면 안내센터의 이정표가 나오며 좌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이내에 안내센터 입구가 나온다.  그리고 좌측 담을 따라가니 곧 입구에 도착했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입장


 새하얀 건물과 나무가 어우러진 입구의 모습이 너무너무 예뻤다.     

 혼자 방문해도 좋지만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이 예쁜 광경을 함께 본다면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입구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큐알 체크인을 하고, 안내 리플릿을 챙긴 뒤에 본관 건물로 향했다.    

나무에 둘러싸인 계단길을 오르는데 기분이 너무 상쾌하고 좋았다. 그리고 그 위에 도착하니 역시 감탄이 날 정도로 역시 새하얀 모습의 예쁜 옛 서울 공관 건축물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1, 2층 전시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는 2층 건물로 1층은 한양도성과 관련된 전시 공관이며, 2층은 시장 공관과 역대 시장 및 혜화동 27-1번지의 역사를 소개하는 공간이다.    


- 제1전시실 : 한양도성과 혜화문

- 제2전시실 : 한양도성과 도시경관    

- 제3전시실 : 시장 공관과 역대 시장

- 제4전시실 : 혜화동 27-1번지의 역사

- 제5전시실 : 대한뉴스로 본 서울시장 공관의 문화행사 소개, 한성판윤~서울시장 연표



본관 입장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건물 내부로 입장했다.


어쩜 내부도 얼마나 예쁘던지. 빠르게 1층 제1전시실 전체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나무 기둥과 천정 골조 등 집의 뼈대가 눈에 들어왔다. 구옥인 만큼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감성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여기는 뭐 계속 예쁜 광경의 연속이다.

본격 해설 프로그램 체험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해설 프로그램 시작

 

 해설 프로그램은 휴무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본래 하루 세 번 실시되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매일 열리지 않으며 열리는 날에도 하루 두 번으로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회차 당 예약 정원은 10명인데, 후에 실무관님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예약 정원이 꽉 차지 않았을 경우, 예약하지 않고 현장을 찾은 방문객들도 희망한다면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되자 드디어 10명 남짓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해설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아래에서는 해설사님의 말씀을 중점적으로 기술하되 리플릿의 내용을 조금 덧붙여 서술했다.






한양도성 축조의 역사


 먼저 한양도성 축조 역사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조선은 건국 이후에 먼저 궁궐과 종묘, 사직을 세웠고, 그다음으로 적으로부터의 방어 및 백성 통제를 위해 한양도성을 건축했다고 한다.


 삼봉 정도전이 주축이 되어 서울의 내사산인 백악산, 낙산, 목멱산, 인왕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태조 5년인 1396년 길이 18.6km의 한양도성이 축조되었다.



축조 시기별 성벽의 형태

낙산 구간 가톨릭대학교 뒷길 성벽 사진


[14세기 : 태조 시기 축성(1396)]


 그럼 누가 한양도성을 축조했을까!? 최초의 한양도성은 강원, 전라, 경상권 등 전국 각지의 백성들 약 197천 명이 불과 여름철 49, 겨울철 48일 기간 동안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지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은 돌을 활용한 석성으로, 평지는 토성으로 축성했다. 즉, 처음에는 돌과 흙이 뒤섞인 성이었다.


 이처럼 축조되는 데 단 98일이 걸린 것, 물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네모 반듯한 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방대한 길이의 성을 불과 100일이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쌓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해설사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질문을 던지셨다. 왜 서울·경기권 백성은 한양도성에 축조에 참여하지 않았을까라고.

 내 마음속 추측과 정답은 일치했다. 서울·경기권 백성들은 앞서 궁궐과 종묘사직 축조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한양도성 축조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 해설사님은 그렇다면 왜 여름철 48, 겨울철 49일 기간에 축조를 했을까라는 질문을 주셨다.

 한 참여자가 바로 정답을 맞혔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지어야 했기에 농한기인 위 시기에 축조를 한 것이었다.

 농번기에 농사, 농한기에 건축이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백성들의 피땀과 희생으로 지어진 최초의 한양 도성이다.



[15세기 : 세종 시기 축성(1422)]


 세종 4년인 1422년 1월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쌓는 등의 대대적인 재정비가 이뤄졌는데, 이때에는 전국의 백성 약 32만 명이 한 달 반 정도의 기간 동안 쌓았단다. 이때의 성돌은 동글동글한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했다고 한다.     

낙산구간 성벽


 해설사님께서 이 시기에 무려 900명의 백성이 사망했다며, “우리가 아는 세종은 성군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이렇게 백성들을 희생시켰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이 물음에는 참여자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알고 보니 세종의 집권 초기여서, 이때는 왕의 권한이 매우 약했다고 한다. 즉 선왕인 태종의 영향과 권한이 강하여 백성들이 희생하며 성을 쌓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종 시기의 재정비 작업이었지만, 사실상 태종 시기에 작업한 것이라 생각해도 될 듯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정말 해설사님의 설명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 : 숙종 시기 축성(1704)]


 한양도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크게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 숙종 시기에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새로 쌓았는데 이때에는 군인들이 주로 참여했다.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 약 7년간에 걸쳐서 보수했으며, 성돌 크기를 가로·세로 약 40~45cm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였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정사각형 모양의 성돌은 바로 이 시기부터 사용된 것이다.     


낙산구간 성벽, 좌측이 숙종 우측이 순조 시기 성벽


[19세기 : 순조 시기 축성(1800)]


순조 시기에는 성돌 크기를 가로·세로 60cm가량의 정방형으로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렸다는 특징이 있다.    


 이상으로 축조시기별 성벽 축조의 역사를 마쳤는데, 바로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의 담장 성벽을 통해서도 축조시기별 성벽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전시안내센터 내부 관람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전, 꼭 담장 둘레를 돌며 축조시기별 성벽을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한양도성의 문


 한양도성의 개괄적 소개와 축조시기별 특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끝난 뒤, 한양도성의 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한양도성의 문은 수문인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다수의 암문 등 여러 가지가 존재하나 대표적으로 사대문과 사소문을 들 수가 있겠다.



* 사대문 :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한양도성의 사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으로 그 이름의 중간 글자를 모으면 인의예지를 적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숙지문이 아니라 숙정문이라고 한 이유는 학자들도 명확히 결론을 못 내렸다고 한다. 백성이 왕보다 지혜로울 수 없다고 하여 ‘지’ 자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을 할 뿐.


[흥인지문]

 한양도성의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의 밖에는 사냥터가 있었고, 왕들의 무덤을 참배하러 갈 때 통과한 문이라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고종 6년인 1869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1907년인 일제시대 때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안팎의 평평한 지형을 보완하도록 문 바깥 쪽으로 반원형의 성벽을 더 쌓은 옹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돈의문]

 도성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돈의문은 세종 4년인 1422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사신들이 주로 출입하던 문이었단다.


 그 이전에는 조금 다른 위치에 ‘서전문’이라는 문이 있었으며 이를 서쪽 출입문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전문에서 돈의문으로 출입문을 바꾼 이후에 백성들은 어려운 말인 돈의문 대신 ‘새로 낸 문’이라고 하여 ‘새문’이라고 불렀고, 여기에서 현재 이 근방의 도로명인 ‘새문안로’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역시 새롭게 알았던 사실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러한 돈의문이 일제시대 때 헐어 없애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매우 안타깝다. 지금 길이 나있어 복원이 불가한 상황이지만 언젠가는 조금 위치를 옮겨서라도 복원을 반드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숭례문]

 국보인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쪽 문이자 공식적인 정문의 역할을 함에 따라, 왕이 행차했던 문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숭례문 이남은 모두 경기도였으며, 이때부터 숭례문 도성 밖은 시장이 발달했다고 한다. 남대문 시장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워낙 유명한 문이라 상세 설명은 생략하겠다.


[정문]

 북쪽은 음습하고 불길하다고 여겨 사람이 다니지 않았으며, 길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단, 나라가 가물었을 때 음기를 받기 위해 기우제를 지낼 때에만 숙정문을 열었다고 설명해 주셨다(양의 기운인 숭례문을 닫고).     

기자는 단순히 산악지형이라 문을 잘 활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새롭게 또 하나의 한양도성 배경지식을 알 수 있어 참 좋았다.



* 사소문 :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   

 본래 한양도성의 동북문인 혜화문의 명칭은 홍화문이었다. 그런데 창경궁의 정문이 홍화문으로 명명되면서 한양도성이 궁궐보다 낮은 위치였기에 그 이름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때 혜화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숙정문이 거의 활용되지 않았기에 실질적인 한양도성의 북문의 역할을 했으며 강원도 및 함경도민, 그리고 사신들이 드나들던 문이었다고 한다.     

 옛 혜화문의 모습은 1층에 화면으로 전시되어 있어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혜화문은 본래 위치보다 조금 더 북쪽인 현 위치에 1994년에 재건되었는데, 하늘에서 바라본 혜화문과 전시안내센터 일대 전경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광희문]    

 흥인지문 인근에 있는 광희문은 태조 때부터 수구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일반 백성들의 장례 행렬이 나가는 문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광희문 밖에는 노제가 빈번히 행해졌고, 무당 집들이 많아 신당리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귀신 신’ 자였다가, 후에 ‘새 신’으로 바뀌었으며 오늘날의 신당동이 이렇게 유래됐다.


[소의문]

 서쪽의 돈의문 근처에 위치했던 소의문은 처형장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돈의문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문이다. 역시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며, 언젠가 복원되길 희망한다.


[창의문]   

 숙정문과 마찬가지로 북쪽의 음습하고 불길한 문이라 하여 사람들이 잘 안 다녔던 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인조반정 때 창의문을 통과했고, 그 이후에 문도 꾸미고 사람들도 드나들게 되었단다.

 창의문에는 한양도성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루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른 문을 복원할 때 크게 참조가 되는 문이다.



성벽의 구조


 한양도성과 관련된 해설의 마무리는 성벽의 구조에 관한 내용이다.     

위 제2전시실은 건물 바깥에서 통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외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채워서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체성과 여장으로 구성되는데, 체성은 성벽을 이루는 몸체를 의미한다.    

 여장은 체성(성벽의 몸체) 위에 조성된 낮은 담장으로 아군이 몸을 숨긴 채 총과 화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이다.

 옥개석은 여장 위에 올려진 지붕돌로 빗물이 체성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고 유사시 밀어 성 위로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는데 쓰인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성벽이 안내센터 담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자처럼 해설 프로그램이 끝난 뒤 들었던 내용을 눈으로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가옥의 역사

 1층에서의 해설이 끝나고, 2층으로 이동해 이 건물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들었다.  


 옛 서울시장 공관이었던 이 건물은 서울 시내에 몇 안 남은 목조 건축물이다.


* 1941~1959 : 개인 주택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일본인이 거주할 목적으로 건물을 지었기에 일본식 구조이며, 우리나라 사람이 건축을 했기에 조선의 양식도 띄고 있고 한편으로 서양의 기법도 융합되어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5년 후 광복 시기를 맞이하면서 일본인 집주인은 가옥을 두고 떠나게 되었다.

 그 후에도 한국인 개인의 가옥으로 사용되다가, 1959년 적이 남긴 가옥 재산을 뜻하는 적산가옥이 되어 나라에서 운영하였다.


* 1959~1979 :  대법원장 공관

 1959년부터 20년간은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곳에서 4•19 혁명재판의 판결문이 작성되는 등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 현장이었다.    


* 1981~2013 : 서울시장 공관

 1981년 박영수시장 때부터 2013년까지 서울시장의 공관으로 쓰였다.


 그러다 한양도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 노력하는 과정에서 서울 공관 건물을 지금의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로 활용하게 되었다.


 현재 2층에는 역대 서울시장의 연혁과 그 기증품, 가옥이 품고 있는 건축사적 의미, 성북구를 기반으로 활동한 문인들에 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바깥 전경


 건물을 나오면 카페가 있는 좌측에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더 호전된다면,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들고 비치된 의자에 앉자 주변의 예쁜 풍경을 보며 여유롭게 즐기면 딱 좋을 듯했다. 기왕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정반대 편인, 건물 우측 방면에는 또 다른 예쁜 공간이 있었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성북동 마을의 모습이 무척 멋졌다.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된 이유가 이렇게 경관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한양도성의 축소판

(입문자가 필히 방문해야 할 곳)


 이처럼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에서는 축조시기별 다른 형태의 성벽과 여장, 성북동 마을의 아름다운 경관바로 건너의 혜화문까지 연계하여 관람할 수도 있다.


 한양도성의 성문, 성벽, 인근 마을의 경관을 모두 볼 수 있어 한양도성 전구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한양도성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에게 이곳을 강력히 추천해 드리는 바이다.


 특히, 해설 예약을 통해 방문하셨으면 좋겠다.

공간이 아담해 해설사님의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온다.

 또 해설사님과 대화를 나눠보니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심을 느낄 수 있었으며, 한양도성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기 때문에 한양도성을 알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에서 해설을 듣고 전시를 관람한 뒤 한양도성에 오른다면, 한층 재미있는 순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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